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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마드 이야기

   
굿모닝몽골3 IMF위기와 몽골선교(1)

1997IMF 외환위기와 몽골 선교

 

 

느헤미야 2:18-20

또 저희에게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신 일과 왕이 내게 이른 말씀을 고하였더니 저희의 말이 일어나 건축하자 하고 모두 힘을 내어 이 선한 일을 하려 하매 호론 사람 산발랏과 종이 되었던 암몬 사람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 게셈이 이 말을 듣고 우리를 업신여기고 비웃어 가로되 너희의 하는 일이 무엇이냐 왕을 배반코자 하느냐 하기로 내가 대답하여 가로되 하늘의 하나님이 우리로 형통케 하시리니 그의 종 우리가 일어나 건축하려니와 오직 너희는 예루살렘에서 아무 기업도 없고 권리도 없고 명록도 없다 하였느니라

 

 

진정한 유목은 목자가 양을 끌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양을 따라다니는 것이라고 한다. 몽골의 유목에 관한 어떤 책에서 읽은 내용이다. 그래서일까 나는 몽골인을 따라다니는 목동처럼 살았다. 그들이 나를 따라온 것이 아니라 나중에는 내가 그들을 따라다니는 형국이었기 때문이다. 내게 몽골은 운명이다. 그만큼 나는 몽골을 사랑했고 지금도 여전히 몽골이라면 사족을 쓰지 못한다. 재한몽골학교와 몽골문화원 등 지금도 몽골과 관계된 일들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위기는 언제나 기회를 가져다준다. 문제가 기회라는 말이다. 이것은 세상의 이치이기도 하지만 실은 하나님 나라를 위한 우리의 여정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말이다.

우리나라에 외환위기가 시작된 것은 1997년이다. 나 또한 무척 힘든 한해를 살았기에 잊지 못하는 해다. 그 해, 나는 성수동 뚝섬에서의 이주민 사역을 접고 새로운 장막을 구하여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동안 얹혀살았던 뚝섬의 교회에서 나가라는 통보를 받았기 때문이다. 19971월 그 교회의 당회는 공식적으로 우리 선교회를 내보내기로 결정하였다는 통보를 내게 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갈 곳이 없었다. 그러므로 나그네로 살아간다는 것은 언제나 고달픈 것이다. 해외에 나가거나 집을 떠나보라. 그리고 아무런 예약도 되어있지 않은 곳에 도착했을 때 어디서 머물러야 하는지를 고민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 보라. 나는 그런 여행을 많이 해 보았다. 그것은 여간 곤혹스러운 일이 아니다.

나와 우리 공동체의 식구들은 갈 곳이 없었다. 나가겠노라고 큰소리를 쳤지만 정작 우리는 갈 곳이 없는 나그네 신세였던 것이다. 그래서 생각해낸 곳이 뚝섬 한강 고수부지였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우리는 텐트의 쇠말뚝 하나 박을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한강 고수부지인들 어디 속 편히 우리에게 장소를 내줄 사람이 있었겠는가? 그때에 나는 엄청난 도박을 하였다. 믿음 하나로 사고를 친 것이다. 단돈 100만원을 가지고 집을 얻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그 때 수중에 꼭 100만원이 있었다. 정말 거지같은 삶이었다. 어떻게 이리도 구질구질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 스스로에게 매일 물어야 했다. 우리는 가난했고 갈 곳은 없었고 오라고 하는 사람도 없었다. 이제 남은 것은 믿음뿐. 겨자씨만한 믿음만이라도 있다면 저 산도 바다에 던질 수 있다고 하신 우리 주님의 말씀만이 남아있는 것이다.

나는 그것을 믿어야 했다. 아니 그것밖에 믿을 것이 없었다. 남은 것이 아무 것도 없었으니까. 우리는 장소를 찾아보기 시작하였다. 그 당시 강변역에 테크노마트가 한창 건축 중이었다. 바로 그 앞 작은 유치원 지하실이 전세로 나왔단다. 찾아갔다. 마음에 들었다. 강변전철역에서도 가깝고 외국인들이 찾아오기에 쉬운 곳이었다.

그러나 두 가지가 문제였다. 하나는 그 건물 주인이 외국인들이 모이는 교회라 하니 더러워서 안 된다 한 것이고, 두 번째는 돈이었다. 25천만 원의 임대료가 문제였다. 두 가지 모두 우리가 해결하기에는 불가능한 일처럼 보였다. 그러나 불가능하다고 포기하는 것조차 우리에겐 사치였다. 나와 선교회는 더 이상 추락할 곳이 없었다. 그러니 무서운 것도 없었다.

도전하기로 했다. 주인집을 찾아가 주인 부부에게 매달려 눈물로 호소했다. 마침 여주인의 조카가 소망교회 부목사란다. 그러니 그 조카를 거론하며 설득을 했다. 내 삶에 대하여도 설명하였다. 나는 군목 출신이며, 뜻이 있어 구로공단에서부터 외국인 노동자들을 선교하게 되었고, 그러다 이렇게 눈에 장애를 입어 고통 받고 있다는 이야기까지 한참동안 나는 눈물을 흘리며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말씀을 더 드리고 싶다고 말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나는 단지 100만원을 갖고 있을 뿐이니 도와달라고 한 것이다. 정말 무릎을 꿇고 빌며 빌었다. 그것이 통했을까? 주인 내외는 내 손을 잡고 집을 빌려주겠다고 결정을 했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그 밤을 나는 추억한다. 주인 할아버지가 내 손을 잡고 정거장까지 데려다 주시던 그 날, 100만원에 가계약을 하고 돌아오던 그날 밤. 그 밤만큼은 정말 행복했다.

그리고 그 다음날부터 우리는 다시 전쟁을 시작한다. 돈과의 전쟁이다. 돈을 꾸어야 한다. 25천만 원이라는 거금을 꿀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했다. 어디에든 돈이 있다면 찾아가 구걸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세상은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았다. 오히려 문제가 생긴 것이다. 그해 199712월 급기야 우리나라에 외환위기가 찾아온 것이다. 그동안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IMF라는 대란이 몰려온 것이다. 이미 그해 10월 입당예배를 드리고 여기저기서 빚을 내고 은행에서 융자를 받아 시작한 공동체가 시작하자마자 엄청난 빚더미에 올라서게 된 것이다.

그러나 믿음은 포기할 수 없는 힘을 준다. 이미 물은 엎질러졌고 문제는 시작된 이후다. 그러니 하나님의 책임이라고 버티는 것 밖에 없다. 부도를 내면 그것은 나의 부도가 아닌 하나님의 부도라고 생떼를 부리며 기도했다. 어린아이가 사고를 치고는 부모에게 책임지라는 꼴이다.

당시 우리 선교회의 위원장이던 이정일 목사님께서 내게 유 목사, 미쳤나?”라고 말씀하실 정도였으니 정말 나는 미치지 않을 수 없었다. 미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차라리 미쳐서라도 내게 맡기신 일을 하고 싶었다.

그때에 이미 몽골인들은 고향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환율의 문제가 생긴 것이다. 선교는 경제 문제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특히 이주민 선교는 그 나라 혹은 우리나라의 경제 문제에 민감하다. 예를 들어 한 외국인근로자가 우리나라에서 한 달에 100만원을 벌었다 하자. 그 돈은 바로 달러로 환전되어야 그의 고향으로 송금할 수 있는데, IMF 이전에는 거의 1000불을 넘어 섰지만 IMF 이후에는 한화 가치의 급격한 하락으로 500불에 불과하게 된 것이다. 돈의 가치가 떨어지니 노동의 가치도 동시에 떨어져 힘들여 일을 해도 힘든 만큼 대가를 받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더 이상 일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주민들은 경제 문제에 민감하다. 특히 환율이 얼마인가는 매우 중요하다. 똑같은 금액의 돈을 받아도 그 돈의 가치는 또 다른 문제다. 최근 몽골의 경제 사정이 매우 나쁘다. 전에는 우리나라 돈 1000원이 그 나라 1000투그릭(tugrik)이었다. 그러나 몽골의 경제가 나빠지니 이제는 우리나라 돈 1000원이 몽골 돈 1800투그릭이 된다. 한국에서 100만원을 벌면 몽골에선 180만원과 같은 가치가 형성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의 경제난은 곧바로 외국인근로자들의 문제로 직결된다. 직격탄은 곧바로 그들의 노동 가치를 형편없이 떨어뜨리고 그들이 여기에 남아 일할 이유를 가져가 버린다.

1998년이 시작되면서 외환위기는 극에 달했고 그런 이유로 몽골인들은 대거 한국을 떠났다. 우리 공동체의 상황 또한 더욱 어려워졌다. 그러나 기적은 고통 가운데 일어나는 법이다.

하나님은 그 극한의 고통 가운데서 우리를 구원하신다. 우리가 미처 생각지 못한 방법과 알지 못한 사람들로부터 오히려 더욱 빠르게 빚을 갚아주시는 것이 아닌가?

지금도 나는 그때에 만난 분들 중 조 집사님을 잊지 못한다. 우연히 친구를 따라 우리 선교회에 오신 집사님은 우리에 대한 아무런 전이해 없이 나를 만났다. 우리의 이야기를 듣고는 바로 우리의 후원자가 되셨다. IMF 환난의 고통이 우리 사회 전체를 멘붕 상태로 몰아가는 그 상황에서 조 집사님은 우리의 빚을 갚아주시겠다고 나섰다. 그러던 어느 날 집사님은 간단한 심장수술을 받는다고 입원하시더니 그대로 천국으로 떠나가셨다. 조 집사님은 우리 공동체에 천사처럼 왔다 가셨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었을까? 그 힘든 시간을 한 여 집사님을 통해 해결해 주신 하나님을 나는 경험했다. 조 집사님은 마치 빌립보 교회를 세우려는 바울을 도왔던 루디아 같은 동역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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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6 : 11-15

11드로아에서 배로 떠나 사모드라게로 직행하여 이튿날 네압볼리로 가고 16:12거기서 빌립보에 이르니 이는 마게도냐 지경 1)첫성이요 또 로마의 식민지라 이 성에서 수일을 유하다가 16:13안식일에 우리가 기도처가 있는가 하여 문밖 강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더니 16:14두아디라성의 자주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 16:15저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가로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있게 하니라

 

우리나라의 환난은 외국인근로자들의 삶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많은 수의 외국인근로자들이 고향으로 돌아가야 했다. 물론 몽골인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돌아가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새로운 요청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다름 아닌 몽골을 한번 방문하여 몽골로 돌아간 사람들을 위하여 교회를 세워달라는 것이었다. 나 또한 먼저 몽골을 한번 가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몽골이라는 나라에 대한 어떤 환상 같은 것들이 있었던 내게 그들의 요청은 설렘이었다. 그래서 이정일 목사님을 비롯하여 여러분의 장로님, 목사님들을 모시고 몽골에 가게 되었다. 19995월 셋째주일이다. 나는 그날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우리 일행이 울란바토르 공항에 도착했을 때에 서울에서 도착한 비행기는 단 하나뿐이었다. 그 당시 울란바토르 국제공항은 우리의 작은 시골 공항보다도 못한 열악한 공항이었다. 비가 왔는지 활주로 주변은 어지럽게 진흙탕물이 고여 있었고, 비행기에서 내리니 비좁은 출입국관리소는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짐을 찾는 동안 나는 밖이 궁금해 연이어 밖의 동태를 살펴보았다. 작은 대합실에 몽골인들이 가득하였다.

누구를 기다리기에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나와 있을까? 서울에서 온 작은 비행기 하나뿐인데... 그렇게 생각하면서 일행과 함께 드디어 밖으로 나갔다. 당시만하여도 시력이 조금 남아 있었던 내게 큰 글자의 현수막이 보인다. '목사님, 환영합니다!'라는 문구가 새겨진 현수막이다. 그리고 여기저기서 달려오는 수많은 몽골인 친구들. 그날 나는 그만 울고 말았다. 족히 백 명이 넘는 몽골인 친구들이 공항에 나와 나를 환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꽃다발을 들고 환영하던 그 날을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교회를 세워 달라고 요청하는 문서를 공식적으로 나와 우리 일행에게 전달하였다. 함께 가신 모든 분들이 감동을 하였다. 그날의 감동이 곧바로 몽골에 교회를 세우게 되었으니 그 교회가 바로 지금의 울란바토르 선교교회다.

199910월 첫째 주일, 울란바토르 선교교회를 창립하고 나는 몽골선교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품게 되었다. 몽골 현지에 교회를 세우면서 더한층 자신감이 생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나만의 생각이었고 하나님의 뜻은 거기까지였다. 울란바토르 선교교회를 창립하면서 당시 우리 선교회에서 함께 사역하던 전도사 한 분을 목사안수를 받게 하여 선교사로 파송을 하였지만 정작 그분은 초기의 마음을 잃어버리고 자신의 생각과 고집대로 몽골선교를 하려고 하였다. 나와 우리 선교회는 한국에서 돌아간 몽골인들을 섬기고 그들이 신앙을 잃지 않도록 지속적인 신앙지도를 할 목적으로 교회를 세웠지만 그분은 우리의 뜻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말았다. 그 과정에 당시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고 배반당했다는 생각으로 잠을 이루지 못한 채 분노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런 마음의 상처도 없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것도 하나님의 뜻이라는 깨달음이 왔고 그래서 이제는 모두 잊어버렸다.

인간이 가진 생각과 마음이란 얼마나 이기적인가?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고 나가다가 하나님의 뜻과 맞지 않아 실패하는 경우, 우리는 종종 실족하여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한다. 처음 시도한 몽골 선교, 그리고 울란바토르 선교교회의 창립과 성장과정에서 나는 절망하고 분노하는 경험을 하였다. 하지만 돌아보면 그것은 나의 생각만으로 하나님 나라를 세워보겠다는 교만의 결과였다. 나의 역할은 그곳에 교회를 세우고 선교사를 보내는 것까지였던 것이다. 사람마다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이 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사명은 한국에서 만나는 몽골인들을 위로하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다. 몽골까지 찾아가는 선교는 다른 사람들의 몫이었다.

그러나 울란바토르 선교교회를 창립해가는 과정에서 나는 당시 울란바토르 시장인 엥흐볼트와 후에 엥흐바야르 대통령의 비서실장이 된 시의회 의장 빌릭트 등 좋은 정치인들을 친구로 두게 되었다.

물론 이들이 내 친구가 된 것은 울란바토르 선교교회만이 아니라 서울에서 시작한 재한몽골학교와 사단법인 몽골울란바토르문화진흥원 등의 사역이 징검다리가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내 삶에 분명한 선교적 사명을 주셨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목회자들과는 다른 것이었다. 찾아가는 선교가 아니라 우리에게 찾아온 사람들을 선교하라는 사명이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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