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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마드 이야기

   
굿모닝몽골3 IMF위기와 몽골선교(2)

21세기를 새로운 유목민의 시대라고 한다. 유목민의 시대란 이주민의 시대 즉 국경과 민족의 경계를 허물고 새로운 땅을 찾아 이주하는 사람들의 시대라는 말이다. 과거의 정치적 이념으로 양분되는 냉전이 사라지고 경제적 이해관계에 따라 자기가 원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찾아갈 수 있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세계화와 다문화 시대로의 진입은 아무도 막을 수 없는 대세임이 분명하다. 나는 그런 상황에서 부르심 받은 목회자다.

 

나는 한국교회 어느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하던 그때에 구로동에서 성수동으로, 성수동에서 강변역을 거쳐 광나루의 재한몽골학교와 나섬공동체에 이르기까지 오직 이 사역만을 운명처럼 붙잡고 살아왔다. 이제는 동대문으로, 나아가 전세계로 새로운 미래 선교의 패러다임을 만들어 가고 있는 중이다.

내가 초기 몽골 선교에서 절망하고 분노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선교가 개인의 욕망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였다.

어떻게 하다 보니 우리나라에 외환위기가 일어났고 그 일들이 몽골인들과 새로운 곳에서 만나는 전환점이 되었으며 그래서 시작한 몽골 현지 교회 개척이라는 상황은 내게 큰 깨달음을 주었다. 조 선교사의 파송과 그의 배반 또한 결국 하나님의 뜻이었음을 고백한다. 나는 이제 그를 이해하고 용납할 수 있다. 당시만 해도 잠을 자다가 벌떡 일어나 혼자 울고불고 난리를 치던 일들이 부끄러울 따름이다. 결국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우리는 그렇게 쓰임 받을 뿐인데 그것을 자신이 한 일로 착각하거나 자신의 자랑거리로 만들려는 어리석음으로 인하여 재를 뒤집어쓰는 결과를 얻게 되는 것임을 나중에야 깨닫게 된 것이다.

 

모든 것에 마음을 비워야 산다. 하나님의 일이란 결국 그분의 사역이고 우리는 순간순간 쓰임 받는 것으로 감사할 뿐이다.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주관하시는 사역이어야 열매가 나타난다.

1995년부터 2000년까지 나섬의 몽골선교는 기적과 절망을 경험하면서 조금씩 성장하고 성숙해 갔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소중한 경험도 함께 하게 되었다.

누군가는 그 때에 그 자리에 있어야 한다. 그것이 역사이며 그 순간을 우리는 실존적으로 살아간다. 그 순간에 하나님께서 나를 그곳에 있게 하신 것이다. 문제는 그 순간을 바라보는 나의 생각과 마음이다. 마음을 더 비웠어야 했다. 나는 교만했고 하나님보다 나의 생각을 더 앞세우려했다. 결국 그런 공명심은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한다. 신앙의 깊은 고백이 없는 가벼운 자기중심적 삶은 언제나 공허한 결과를 만들어낼 뿐이다  

바울이 바울 될 수 있었던 것은 그 혼자만의 힘이 아니었다. 바울에게는 언제나 수많은 동역자가 있었다. 1차 선교여행 중 처음으로 만났던 디모데와 예루살렘 공의회의 결과를 갖고 예루살렘으로부터 찾아왔던 실라, 2차 선교여행의 전환점이 되었던 드로아에서 바울과 동행하기 시작한 의사 누가 등이 대표적인 동역자들이다. 바울은 늘 누군가와 동행하며 선교여행을 해야만 했었다. 그는 다메섹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신비적으로 만났으며 그때 이후로 시력에 장애를 갖게 되었다고 한다. 나처럼 눈에 문제가 생겨 혼자서는 다닐 수 없는 장애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에게는 언제나 동행자가 있었고 가는 곳마다 바울의 사역을 돕는 수많은 동역자들이 있었다. 선교는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도 하나님 나라를 위한 선교적 삶은 공동체를 이룰 때 가능하다. 그 자신만의 공로가 아님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함께 하는 이들이 있어야 한다.

바울의 2차 선교여행에서 드로아는 대단히 중요한 공간이 되었다. 바울은 드로아에서 마케도니아 사람의 환상을 통해 에베소가 아닌 마케도니아로 갈 것을 결심하게 되었다. 그가 바다를 건너 네압볼리의 빌립보에 이르러 빌립보 교회를 세울 때에 바울을 도운 이가 자주장사 루디아이다. 루디아는 에베소 출신의 신실한 여자였다. 그녀의 헌신이 빌립보 교회의 시작이 된 것이다. 그 후 바울이 데살로니가를 지나 고린도에 이르렀을 때에는 그곳에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라는 로마에서 온 유대인 부부를 만나 동역한다. 그들은 나중에 바울이 에베소로 선교지를 옮기게 되었을 때에도 바울과 함께 에베소로 이주할 정도로 바울에게는 소중한 동역자들이다. 로마 사람들에게 보내는 바울의 편지를 로마 교회에 전달한 이는 여 집사 뵈뵈였다고 로마서에 기록되어 있다. 가는 곳마다 그 지역에는 바울을 돕는 이들이 나타났다. 바울은 홀로 선교한 사람이 아니다. 그를 돕고 후원하는 수많은 동역자들이 있었음으로 바울 선교는 가능했던 것이다.

나 역시 바울처럼 나섬과 몽골 학교, 나아가 몽골 선교를 도운 이들이 있었음을 기억하고 살아야 한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뚝섬에서 강변역으로 이주하던 당시에 결정적으로 우리를 도운 이는 바로 조 집사님이라는 분이었다. 또 한 분의 집사님이 기억나는데 그분은 영락교회 임영규 집사님이다. 임 집사님은 뚝섬에서 강변역으로 이주하던 당시에 많은 도움을 주신 분이다. 우리의 사정을 어떻게 알고는 직원을 통해 후원금을 보내주었는데 나는 그때의 감격을 결코 잊지 못한다. 아무런 연락도 없이 후원금을 보내주신 것이다. 기대하지 않았던 일들이 곳곳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름 모를 수많은 이들의 사랑이 없었다면 나섬의 오늘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특별히 그 당시에 잊을 수 없는 분들 중 뚝섬의 상원교회 김창호 목사님과 임순임 권사님이 있다. 내가 이 글을 쓰고 있을 즈음 김 목사님이 갑자기 소천하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김 목사님은 마음이 착한 분이셨다. 나하고는 일면식이 없었음에도 우리의 사역을 위하여 자신이 목회하던 교회의 지하실을 내주었던 분이다. 교회의 장로님들과 교인들의 반대가 있었음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김 목사님은 소신을 굽히지 않고 나섬의 사역을 위하여 공간을 마련 해주신 분이다. 나섬이 그곳에서 강변으로 이사를 하던 즈음 목사님은 그 교회와 불화를 겪게 되면서 결국 그 교회를 떠나셨다. 그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먹먹해진다.

상원교회 교인들 중 잊을 수 없는 분이 임 권사님이다. 임 권사님은 서울노회 여전도회 임원으로 열심히 하나님 나라 사역에 헌신하던 분이었는데 그 당시에 우리의 사역을 돕던 몇 안 되는 교인들 중 한분이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어느 날 내가 소망교회에서 재활용 물건을 많이 얻어 온 일이 있었다. 소망교회 곽 목사님과 만난 이후 구로동에서 이주민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으므로 그 때에 구로동 사역을 도와 주셨던 분 중 소망교회의 김택청 장로님이라는 분이 계셨는데 그분은 치과 의사였다. 그 부인 되시는 홍 권사님이 소망교회에서 재활용 옷가지를 나에게 모아 주신 것이다. 한 트럭쯤 헌 옷을 가져오니 교회 마당에 산더미처럼 쌓였다. 처음엔 난감했다. 이 물건들을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을 하고 있는데 그때에 임 권사님이 나타나 자신이 팔아보겠다는 것이 아닌가!

뚝섬에는 한국방송통신대학 분교 건물이 있어 저녁이 되면 공부를 하기 위하여 학생들이 모여들기 시작한다. 뚝섬역과 방송통신대로 가는 길목으로 헌 옷을 가져다가 길거리 장사를 시작했다. 나는 물건을 그곳으로 옮기고 한 발짝 떨어져 구경을 하는 것이 전부였다.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이기도 했고 뭔가 부끄러운 마음이 들어서 이기도 했다.

그런데 임 권사님은 옷소매를 걷어 올리고는 본격적으로 거리 장사를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이 많은 헌옷들이 과연 다 팔릴 것인가 의심하면서 먼발치에서 구경을 했다. 그런데 한 두 사람씩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무조건 한 벌에 500이라는 문구가 씌어진 팻말을 걸고 거리에서 소리를 지르셨던 임 권사님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불가능하게 보이던 일들이 일어난 것이다. 한 벌에 오백원이라면 그게 무슨 돈이 되겠는가 싶겠지만 그렇게 해서 모은 돈이 오백만원이 되었다. 꼬박 이틀 동안 거리에서 헌옷장사를 해서 임 권사님이 내게 가져다주신 돈이 오백만원이었던 것이다. 오백원짜리 헌옷을 팔아 선교기금이라면서 오백만원을 가져오시니 정말 꿈인가 싶었다. 부끄러움도 많이 타시고 말도 많이 하지 않으시던 권사님이 거리 장사를 해서 모아 가져다 준 돈을 받고 한동안 눈물이 났다. 아무도 우리를 돕지 않는다며 괴로워하던 내게 이런 응원군이 있었구나 싶어 정말 감격스러웠다. 임 권사님은 정말 고마우신 분이다. 나는 이렇게 선교기금을 만들고 이주민 선교를 하며 살았다. 돈보다 더 진한 사랑을 받으며 살았다. 그때의 경험이 나중에 사회적 기업을 만들고 지금까지 나섬 사랑나눔가게를 하게 된 동기가 된다. 나섬에서는 지금도 헌옷가지를 모아 재활용 가게를 하는데 그것은 뚝섬시대 때에 내게 보여주신 임 권사님의 헌신적 모습에서 얻어진 것이다 

1997년 외환위기를 겪으며 나는 더욱 강해질 수 있었다. 아무 것도 없이 무조건 일을 벌이고 감당한다는 것이 불가능하게 보였지만 하나님은 그때마다 우리를 돕는 이들을 보내주시거나 혹은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지혜를 주셨다. 그리고 그때부터 나는 많은 일들에 도전하였다. 도전하지 않으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도 그 당시다.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입으로만 어떻게 하나 걱정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아무런 일을 하지 않으면 그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기적이란 일단 도전하고 일을 시작해야만 일어난다. 나는 지금도 성공하기 원한다면 일단 일을 벌이라고 말한다. 사고를 쳐야 그 일을 감당하기 위하여 움직이기 때문이다. 마음이 시키지 않으면 몸이 먼저 뛰어들어야 한다. 마치 요단강이 갈라지던 그 사건처럼 말이다. 

여호수아 3:14-17

14백성이 요단을 건너려고 자기들의 장막을 떠날 때에 제사장들은 언약궤를 메고 백성 앞에서 행하니라 3:15(요단이 모맥 거두는 시기에는 항상 언덕에 넘치더라) 궤를 멘 자들이 요단에 이르며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물가에 잠기자 3:16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그쳐서 심히 멀리 사르단에 가까운 아담 읍 변방에 일어나 쌓이고 아라바의 바다 염해로 향하여 흘러가는 물은 온전히 끊어지매 백성이 여리고 앞으로 바로 건널쌔 3:17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요단 가운데 마른땅에 굳게 섰고 온 이스라엘 백성은 마른 땅으로 행하여 요단을 건너니라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제사장들이 먼저 법궤를 메고 범람하는 요단강 물에 뛰어 들라 하셨다.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순간이다. 죽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있었지만 그 순간 그들은 요단강 물에 첫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기적은 일어났다.

머리는 시키지 않았다. 마음이 그들의 발걸음을 강요하지도 않았다. 아니 아예 머리와 마음은 요단강에 뛰어들면 죽을 수도 있다고 가르쳤을 것이다. 믿음은 머리로 계산하고 뛰어드는 것이 아니다. 선교는 잔머리를 굴려서 하는 것도 아니다. 마음이 시키지 않아도 먼저 몸으로 달려들어야 한다. 그것이 유일한 존재양식이다. 그것이 나섬의 오늘을 만든 삶의 존재양식이다. 나는 수없이 도전하고 실패했다. 제대로 성공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뚝섬에서 임 권사님과 거리의 장사를 하면서 삶의 치열함과 열정을 배웠다. 성공하지 못했지만 도전했다. 정말 열정으로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장 성공하지 않아도 도전하는 것이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성공은 나중에 올 수도 있다. 실패가 두려워서 도전하지 않는 것이 더 큰 문제라고 판단했다. 나는 이렇게 길거리 헌옷 장사를 하며 나섬의 사역을 했다. 그리고 그것은 내게 큰 자산이 되었다. 후에 치즈 떡볶이 장사를 하고, 우렁이 만두를 만들어 팔기도 했으며, 커피를 배워 커피 생두를 네팔에서 수입해오는 공정무역을 하기도 했다. 나는 앞으로도 스스로 살아가는 경제적 자립의 길을 만들기 위하여 새로운 도전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사도행전 16 : 6-10

6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16:7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는지라 16:8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16:9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가로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16:10바울이 이 환상을 본 후에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몽골 선교를 시작한 것은 분명히 뚝섬에서부터다. 한국에 찾아온 몽골인들을 만나고 그렇게 시작된 몽골 선교는 1999년 외환위기를 겪으며 자연스럽게 몽골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우리 공동체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몽골인들이 자국으로 돌아가면서 그들이 울란바토르에 자신들을 위한 새로운 교회 공동체를 세워 달라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세워진 교회가 1999105일 창립예배를 드린 울란바토르 선교교회다. 당시 우리 선교회의 조 전도사님을 목사 안수 후 선교사로 파송했다.

서울에서 나 자신도 선교하기 힘들어 헉헉대고 있을 그 와중에 선교사를 파송한 것이다. 외환위기로 은행 이자를 감당하기 어려웠던 우리가 선교사를 파송하고 교회를 세운 것이다. 지하실에서 하루하루 사는 것이 고통스러웠던 그때에 몽골에 선교사를 파송하고 교회를 세운다고 했으니 나는 분명 정상이 아니었다. 미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일을 시작한 것이다. 한국에서 이주민 사역에만 전념해도 할 수 있을까 말까 하는 그 힘든 사역을 하면서 나는 몽골 울란바토르에 새로운 도전을 한 것이다. 돈 한 푼 없이 선교사를 파송하고 교회를 세워 몽골 선교의 새로운 지평을 열겠다고 호언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놀랍기보다 웃기는 일이다. 누가 나를 말리지 않은 것은 다행이다. 왜냐하면 그때부터 나는 한국에서 세계로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만이 아니라 전세계로 나아가는 것이 우리가 살길이며 그것은 국내의 다문화 사역과 더불어 우리가 갈 길이라는 새로운 인식의 확장이 일어난 시기였다.

그때에 몽골선교의 지평을 확장시키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우리는 여전히 한 곳에 안주하고 있었을 것이다. 몽골에 새로운 선교적 도전을 하자고 말을 해놓고 나는 그 말에 책임을 져야 했다. 선교사를 파송해 놓았으니 그의 선교비도 감당해야만 했다. 한국의 이주민 선교 공동체도 문제였지만 몽골은 또 어떻게 할 것 인가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외환위기의 절정에 이르렀을 때에 나는 말도 되지 않는 새로운 사고를 치고 있었다. 나는 사고를 치고 하나님은 그 뒤를 쫒아 해결해 주셨다. 이것이 내가 사는 방식이다. 나는 일을 벌이고 하나님은 그 일을 감당하신다는 것이 내 믿음이다.

바울이 드로아에서 빌립보로 바다를 건너간 것처럼 나도 마케도니아 사람의 한상을 듣고 몽골로 들어갔다. 몽골에는 또 다른 사역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이 울란바토르 선교교회의 창립이며 오늘날 몽골 평화 캠프 사역에 이르는 첫 발걸음이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내게 몽골선교를 위하여 붙여주신 분은 지금 몽골 평화 캠프를 위하여 파송 받아 몽골에서 선교 중인 허성환 선교사님이다. 허 선교사님은 장신대 신대원 선배이며 나이로는 나보다 열 살이나 많은 큰 형님뻘이다. 당시 허 목사님은 울산 평강교회 담임이셨는데 후배가 몽골 선교를 하니 자신도 돕겠다면서 따라하시다 그만 스스로 몽골선교사가 되신 분이다. 생각해보면 참으로 드라마틱한 만남이며 동역이다. 그때에 울란바토르 선교교회의 창립과 더불어 울란바토르 외곽의 거르더크라는 곳에 거르더크 교회를 세웠는데 그곳이 지금 우리가 몽골 평화 선교센터를 세우려는 곳이다. 정말 놀라운 섭리다. 그때는 미처 몰랐다. 거르더크에 왜 교회를 세워야 하는지 솔직하게 나는 의심하고 있었다. 거르더크 지역은 탄광지역이면서 과거 사회주의 시절에 소련의 공군 비행장이 있었던 곳인데다 소련이 사회주의를 포기하고 소련의 위성국가로 존속하던 몽골에서 군대를 철수하면서 거르더크의 공군 비행장도 폐쇄되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거르더크에 가보니 소련의 공군비행장은 물론이고 그 지역 자체가 완전히 무너진 유령의 도시처럼 느껴졌다. 소련의 군인들이 살던 아파트는 이곳저곳이 뜯겨져 귀신이 나올 것 같은 폐허가 되어있었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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