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모닝 몽골7 벽 안의 문을 열다(1) > 노마드이야기

본문 바로가기


노마드 이야기

   
굿모닝 몽골7 벽 안의 문을 열다(1)

벽 안의 문을 열다

 

잠언 16:9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

 

2003년이 시작되면서 한 가지 고민이 생겼다. 재한몽골학교가 좀 더 발전하기 위해서는 몽골정부로부터인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우리 학교에서 공부하고 돌아간 몽골아이들에게 몽골교육부에서 학력을 인정해 주지 않기 때문이었다. 학력인정을 받지 못하니 우리 아이들이 이곳에서 몇 년 간 공부를 해도 몽골에 돌아가면 다시 처음부터 학교를 다녀야 하는 일이 생긴 것이다. 그 문제를 풀기위해서는 내가 직접 몽골 교육부 장관을 만나 해결하는 길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해 8월 나는 몽골을 방문하고 당시 울란바토르 시장인 엥흐볼트를 찾아갔다. 그에게 우리 학교의 이야기를 설명하며 교육부 장관을 만날 수 있도록 주선해 달라고 하니 그 자리에서 교육부 장관에게 전화를 해주는 것이 아닌가?

그날 오후 나는 몽골의 교육부 장관을 만나 우리 학교의 어려움을 이야기하면서 우리 학교에 몽골 교육부가 인가를 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우리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것이어서 매우 난감하였다. 교육부 장관의 말은 이러하였다.

몽골 역사상 몽골 이외의 국가에 몽골학교가 세워진 일은 한국이 처음이기 때문에 당장 재한몽골학교를 인가해줄 수 있는 어떤 법적 근거도 없습니다. 지금으로서는 재한몽골학교를 정식 학교로 인가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려우므로 우리의 인가를 받기 위해서는 먼저 한국 정부로부터 학교인가를 받아야합니다.’라는 것이었다. 혹 떼려고 갔다가 혹 붙이고 돌아온 격이었다. 그의 말대로라면 우리 학교가 몽골 정부로부터 인가를 받으려면 먼저 대한민국에서 인가를 받아오라는 말이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대답이었다.

세상에 어찌 이런 나라가 존재할 수 있는가? 자기네 아이들을 교육시키는 것에 대하여 이렇게 무책임하고 무관심할 수 있다는 사실에 당황스럽고 황당하기까지 하였다. 몽골은 그런 나라였다. 내가 느끼기에 몽골은 국가보다는 개인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유목민의 국가였다. 그래서 몽골학교를 만들고 운영하면서 가장 힘들고 어려웠던 점은 그들의 의견과 생각이 일치되기가 참으로 어렵다는 것이었다. 학부모들도, 정치인들도 공공의 선보다는 자신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들이었다.

결국 몽골 교육부에서는 한국에서 먼저 인가를 받아오면 몽골에서도 인가를 내 주겠다는 것이었다. 하는 수 없이 우리는 먼저 우리나라에서 외국인학교를 인가 받는 것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했다.

 

통상적으로 우리나라의 외국인 학교는 소위 귀족학교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대체로 영미계 학교, 일본 학교, 프랑스 학교, 독일 학교, 그리고 중국인들이 세운 화교학교를 외국인 학교라 부른다. 뿐만 아니라 그들 학교의 설립자는 무조건 그들 자신이어야 한다. 자기들의 자녀를 위한 학교를 세우는 것이니 맞는 말일게다. 미국 사람들이 미국학교를 세우려 한다면 그들 스스로 학교를 세워야 한다. 요즘은 투자를 위하여 우리 정부나 지자체에서 지원을 하기도 하지만 학교 설립의 주체는 우리나라 사람이 아니라 그들 자신이어야 한다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그런데 우리 학교는 현지인이 아니라 그들 자녀를 위해 한국인이 세우려는 것이다.

 

2003년 가을 어느 날 나는 몇 명의 나섬 스텝들을 데리고 서울시 교육청을 방문했다. 외국인학교 설립에 도전하기로 한 것이다. 외국인학교 설립 담당자를 만났다. 담당 공무원은 우리가 재한몽골학교를 정식 외국인 학교로 인가를 받고 싶다고 하니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목사님, 그냥 지금처럼 대안학교로 운영하세요. 외국인학교로 인가를 받아도 정부로부터는 아무런 지원이 없을뿐더러 이런 학교는 우리 정부에서나 교육청에서 인가를 내줄 수 없습니다.”라고 잘라 말하였다.

그래도 나는 우리 학교를 정식 외국인학교로 인가를 받고 싶다고 하니 그 공무원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만약 몽골학교를 정식학교로 인가를 내준다면 심각한 문제가 생깁니다. 지금 몽골학교의 학생들 중 상당수가 미등록 외국인노동자들의 자녀이거나 아이들 가운데서도 많은 학생들이 불법체류 신분으로 체류하고 있는데 만약 우리가 그런 학교에 인가를 내준다면 불법체류를 공식적으로 인정해 주는 논리적 모순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니 이 학교는 절대로 인가를 내줄 수 없습니다. 이건 불가능한 요구입니다.”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공무원 개인으로 우리의 사정을 이해할 수는 있어도 법적으로 우리를 인가해 주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그의 말에 공감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말에 그대로 수긍할 수는 없었다.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우리 학교가 인가를 받지 못한다면 아무런 법적 제도적 보장이 없는 그냥 무인가 대안학교일뿐이었다. 나는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 교육 공무원의 말은 맞는 말처럼 들리지만 또 한편 생각하니 모순이 있었다. 나는 다시 교육청을 찾아갔다.

"선생님의 말은 맞는 것 같지만 사실은 틀립니다. 우리나라의 아이들도 미국에 가면 불법체류를 하더라도 교육받을 권리는 주지요. 그것이 우선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아이들은 신분과 종교와 인종에 관계없이 교육받을 권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정해놓은 것이 유엔아동권리협약이라는 것이죠. 국제적 조약이 우리의 헌법보다 우선입니다. 그러니 우리아이들도 교육받을 수 있도록 인가를 내주는 것이 마땅합니다. 해 주십시오."

 

그 교육 공무원은 말없이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때부터 나는 그와 엄청난 신경전을 벌여야 했다. 그는 내 논리에 수긍은 했지만 자신의 입장만큼은 고수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우리학교가 인가를 받는 데는 말로 다할 수 없는 시간과 고통이 따라야했다. 가장 먼저 다가온 어려움은 서류를 만드는 것이었다. 학교 인가를 받기 위해 갖추어야할 서류가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한 번은 교육청으로부터 몽골정부의 추천서를 받아오라는 요청을 받았다.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일단 대사관에 요청해보기로 하였다. 당연히 대사관에서 해줄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그것은 내 착각이었다. 대사관에서는 몽골학교 설립을 위한 추천서를 써주지 않았다.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자기네 나라 아이들의 학교를 세우는데 왜 추천서를 만들어 주지 않는 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몇 번이나 대사관에 찾아가 대사를 면담했다. 그러나 그는 묵묵부답이었다. 답변조차 해주지 않는 것이다. 화가 났다. 왜 몽골학교의 인가를 위하여 추천서를 써주지 않느냐는 나의 말에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으니 화가 나기 시작했다. 도저히 그대로 갈 수는 없다는 판단이 들었다.

 

그 즈음 몽골 대사가 우리 몽골 문화원을 방문하게 되었다. 몽골의 어떤 행사를 위하여 그를 초청해 놓고 그날을 기다렸다. 나는 혼자 생각하기를 추천서를 써주지 않는 이유가 분명히 있을 것이라 생각하면서 그날은 반드시 담판을 지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날이 되어 대사가 왔다. 행사를 조촐하게 치루고 난 후, 대사를 내 사무실로 불러들였다. 그리고는 문을 잠가 버리고 대사와 단 둘이서만 이야기를 나누었다.

 

몽골학교 인가를 위하여 왜 대사가 추천서를 써주지 않느냐고 물었다. 처음에는 조용히 예의를 갖출 작정이었다. 그러나 그날도 대사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속에서 화가 나기 시작했다. 그날 나와 대사는 큰소리를 지르며 말싸움을 해야 했다. 이유가 무엇이냐고 직설적으로 물었다. 대사는 끝까지 추천서를 써줄 수 없다고 고집을 부리고 있었다.

나는 그날 처음 알았다. 몽골 대사가 얼마나 한국을 싫어하는지를 알았다. 우리 한국 사람들에 대하여 얼마나 분노하고 미워하는지도 알았다. 그는 주한몽골대사가 되기 전에 북한 몽골대사였다. 물론 한국말을 유창하게 하는 사람이다. 북한 김일성 대학 출신이라는 얘기도 어디선가 전해 들었다.

그가 우리를 싫어하는 이유를 말해주었다. 그것은 내가 목사이기 때문이란다. 기독교 교육을 시키는 몽골학교의 설립을 도저히 동의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이유였다.

 

그는 북한에 대하여는 호의적이었지만 천민자본주의에 빠진 한국인들의 상식 없음에 분노하고 있었다. 그에게는 한국인들에 대한 신뢰가 없었다. 그는 한국인들로부터 용서할 수 없는 차별을 당했다는 이야기도 하였다. 모든 것이 얽혀 있었다. 한국인에 대한 분노와 실망, 그리고 내가 목사이며 기독교 학교를 만드는 것까지 모두가 그에게는 부정적으로만 느껴졌던 것이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니 싸움으로는 안되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그래서 그때부터는 그와 친하게 지내려 노력을 하였다. 그를 설득하는 것만이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를 설득하고 주변의 인사들을 통하여 우리를 이해시키는 것이 필요했다.

 

그때에 나타난 분이 가재모 장로님이다. 가 장로님은 한국통신의 상무로 계실 때부터 나와는 인연이 있는 분이다. 국제관계와 대외업무를 주로 맡아서 하는 부서의 책임자로 나와 만나 몽골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었다. 가 장로님이 몽골대사와 친하게 지내는 사이라는 이야기를 들었기에 가 장로님을 찾아가 도와달라고 부탁을 했다. 결국 가 장로님이 중간에서 몽골대사에게 우리를 이해시키고 설득하는데 성공하였다.

추천서 종이 한 장을 받아오는데 이토록 힘이 들었다. 나는 추천서를 받던 날 정말 기뻤다. 그것으로 모든 것이 다 해결 되는 줄 알았기 때문이다.

 

그날 이후로 나와 몽골대사는 가까운 친구처럼 자주 만나 식사도 하고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의 마음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한국 기업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한번은 저녁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우리 기업들이 몽골의 지하자원 개발에 많이 참여하고 있으나 인내심이 너무 부족하다고 했다. 한국기업은 당장 이익이 창출되지 않으면 그대로 철수해 버리고 그래서 많은 손실도 본다고 말해주었다. 어떤 기업은 지하자원을 개발하는데 조금 땅을 파다가는 자원이 나오지 않는다며 그 광산을 캐나다 기업에 헐값으로 매각하고 철수 했단다. 그런데 그 캐나다 기업이 조금 더 파니 엄청난 자원이 있더라는 것이다. 한국기업은 이런 식으로 기업을 운영하느냐며 나에게 오히려 물어왔다. 그는 자기 나라의 종교가 라마불교가 아니냐며 우리 학교가 기독교 교육과 예배를 드리니 그래서 반대한 것이라 했다.

몽골대사로부터 추천서를 받아 교육청에 서류를 제출했다. 그것으로 다 되는 줄 알았다. 정말 이제는 우리 학교가 외국인학교가 되는 줄 알았다. 그러나 몽골정부 추천서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더 큰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교육청 공무원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학교 인가는 요원하다고 했다. 학교 교실 등을 비롯하여 재산도, 어떤 교육을 위한 기본적인 인프라도, 학생들을 가르치는 정식교사도 준비되지 않았다며 또 서류를 반려하는 것이었다. 그때까지 우리 학교에 무슨 재산이 있을 것이며, 몽골인 정식 교사 또한 있었겠는가?

 

 



hi
   


[04982] 서울특별시 광진구 광장로 1(광장동 401-17)
나섬공동체 대표전화 : 02-458-2981 사단법인 나섬공동체 대표자 유해근
COPYRIGHT © NASOM COMMUNITY.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