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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마드 이야기

   
굿모닝몽골8 외국인학교 인가 이후의 변화(2)

몽골 대통령 영부인과 몽골 지도자들의 방문

 

2007년 초여름, 몽골 대통령 엥흐바야르와 그의 영부인이 한국을 공식 방문했다. 그가 한국을 방문하기 몇 주 전부터 청와대와 몽골대사관에서는 일정을 짜기에 분주했다. 특히 영부인의 몽골학교 방문을 결정해 놓고 방문 며칠 전부터는 경찰이 우리 센터를 중심으로 경비를 서고 경호원들이 수시로 드나들며 동선을 체크하는 등 매우 분주하게 돌아갔다.

드디어 영부인이 우리 학교에 찾아왔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 눈의 시력이 조금 남아 있을 때였으니 영부인의 얼굴을 조금은 기억한다. 매우 굳은 표정으로 학교에 들어섰던 그녀의 모습을 기억한다. 왜 그랬을까?

좁은 몽골학교 골목으로 차가 들어왔다. 골목 안은 언론사 기자들을 비롯해 몽골 측 대사관 직원들, 청와대 경호원, 경찰 등 정말 아수라장이었다. 입구는 철저하게 막아놔 아무도 들어갈 수 없도록 차단되었고 기자들이 난리가 났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야 취재를 할 수 있는데 입구에서 봉쇄하고 막아버렸으니 여기저기서 불평하고 난리가 난 것이다. 그러는 순간에 영부인이 차에서 내려 걸어왔다. 나는 밖에서 영부인을 영접해야 했다. 몽골 아이들은 꽃다발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영부인의 얼굴에서 기쁨이나 웃음을 찾아 볼 수 없는 것이 아닌가? 너무도 기이했다. 나도 억지로 웃을 수 없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영부인은 철저한 라마불교 신자였다. 그런데 몽골학교를 교회에서 운영하고 있으며 지금 영부인이 가야하는 곳이 교회라고 알려주었더니 그때부터 영부인의 얼굴이 그렇게 굳어졌다고 한다. 예배당에서는 아이들이 모여 영부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영부인이 들어오자 아이들은 박수를 치고 좋아했다. 그러나 영부인의 얼굴은 여전히 냉랭했다. 강당은 긴장으로 가득했다. 나도 긴장하면서 조금은 기분이 상해 있었다. 자기나라 아이들을 만나러 오면서 어떻게 얼굴 표정이 저런가하는 생각이드니 언짢았던 것이 사실이다.

아이들이 준비한 공연이 시작되었다. 무대 위에서 아이들이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 한 삼십분쯤 시간이 흘러갔다. 이제 영부인이 아이들에게 한마디 하는 시간이 되었다. 나는 그때에 영부인의 얼굴이 아주 편하게 그리고 웃음과 감동으로 충만해 있는 것을 보았다. 영부인이 마이크를 잡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런데 이야기가 끝이 없는 것이 아닌가? 강당 뒤쪽에서는 몽골영사가 시계를 보며 다음 일정을 재촉하고 있었다. 락바라는 그 영사는 나하고 친하게 지낸 사람인데 시간이 너무 늦어지고 있다며 계속해서 비서인지 하는 사람에게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영부인의 시계는 멈추어 버린 듯 계속 이야기가 이어지고 있었다. 5분이면 충분할 것 같은 그런 의례적인 위로와 격려가 아닌 진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아이들과 몽골교사들은 엄숙하게 그리고 진지하게 영부인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나의 마음도 편안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나도 어느새 영부인처럼 웃고 있었다. 드디어 영부인의 이야기가 끝이 났다. 영부인은 말을 마치고는 나에게 악수를 청해왔다. 나는 그녀의 손을 붙잡고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영부인도 나에게 고맙다며 화답을 했다. 내가 유일하게 알아듣는 몽골어는 '안녕하십니까?'' 감사합니다.'였으니 나도 그 말은 알아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기분이 좋아졌다. 무언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교감을 영부인과 나눈 것 같아 기뻤다.

그날 저녁 소공동의 롯데호텔에서는 엥흐바야르 대통령이 수여하는 훈장 수여식이 예정되어 있었다. 나와 김건철 장로님이 초청되었다. 우리에게 훈장을 수여한다는 것이었다. 몽골문화원과 몽골학교를 세워 몽골과 한국의 우호증진에 이바지한 공로를 인정하여 훈장을 수여한다고 했다. 우리가 롯데호텔에 도착하니 벌써 많은 이들이 준비하느라 분주했다. 몇 사람의 아는 얼굴도 보였다. 이한동 전 국무총리와 김상현 전 국회의원도 있었다. 낮에 우리 학교에 영부인이 왔을 때에 통역을 하던 친구도 보였다. 나를 보더니 그가 다가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 아닌가!

 

"영부인께서 처음 몽골학교에 가실 때에는 그곳이 교회라고 하니 얼굴이 그리 밝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의 공연을 보시면서 점점 바뀌었습니다. 나중에 학교를 나와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차 안에서 영부인께서 굉장히 감동 받았다고 좋아하셨습니다. 목사님 이야기도 하셨구요."

 

그 얘길 들으니 기분이 좋았다.

훈장 수여식이 시작되었다. 김건철 장로님은 가장 높은 훈장을 받으셨고, 나는 친선훈장을 받았는데 그것도 상당한 훈장이라 했다. 훈장 수여식이 끝나고 대통령과 사진을 찍는 순서가 되었다. 그런데 그 순간 재밌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본래 대통령과 사진을 찍게 되면 대통령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좌우에 서서 사진을 찍어야하는데 나와 김 장로님 그리고 엥흐바야르 대통령이 사진을 찍는 순간 위치가 바뀐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중앙에 서고 김 장로님이 나의 우편에, 엥흐바야르 대통령이 나의 좌편에 서게 된 것이었다.

내가 대통령 자리에 서고 정작 몽골 대통령이 내 옆에 서서 사진을 찍은 것이다. 나는 지금도 그 순간의 일들을 기억한다. 내가 눈이 잘 안 보이는 것 같으니 대통령이 나를 이끌어 가운데에 서게 한 것이다.

마침 그곳에 나와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던 빌릭트 비서실장이 있었다. 그는 울란바토르시의 시의회 의장 때도 나와 자주 만난 사람이다. 키가 크고 남자답게 생긴 빌릭트 비서실장은 대통령과 사진을 찍고 난 후에 자신과도 사진을 찍자며 내 손을 잡았다. 빌릭트 실장은 후에 울란바토르 시장이 되어 다시 만났다. 그때의 이야기는 후에 하겠지만 그가 울란바토르 시장으로 있을 때에 그는 우리에 대하여 매우 협조적이었다. 특히 연세친선병원의 원장으로 계시던 박돈상 장로님의 일을 해결해 준 일은 잊을 수 없다.

재한몽골학교가 외국인학교로 인가를 받으면서 우리의 위상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모든 것은 연동되어 있다. 몽골학교가 없었다면 만날 수 없었던 사람들이다. 대통령과 만나고, 비서실장과 만나고, 울란바토르 시장은 물론이고 이제는 총리와 외무부 장관, 인권위원장과 국회의원, 장관들까지, 만날 사람이라면 모두 만날 수 있었다.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몽골학교와 몽골문화원의 존재 의미가 그렇게 커졌다는 것이다.

선교를 넘어 외교로 우리의 역할은 더욱 확장되었다. 몽골학교와 문화원은 민간교류단체를 넘어 선교의 못자리이며 우리나라와 몽골을 이어주는 외교적 채널로서도 그 역할이 더 중요해지고 있다. 어쩌면 우리나라의 미래도 우리 몽골학교와 문화원의 미래와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몽골은 세계적인 자원부국이다. 구리와 석유, 석탄과 금, 희토류에 이르기까지 없는 것 없는 자원을 가진 나라다. 땅의 넓이만 해도 우리 남한 땅의 17배이고 한반도의 8배에 이르는 광대한 나라다. 요즘은 그 중요성이 덜하지만 머지않아 몽골의 중요성이 극대화할 것임이 분명하다. 특히 한반도 통일에 있어 몽골의 역할과 의미는 매우 크다. 지금 많은 탈북자들이 몽골을 경유하여 국내로 들어온다. 몽골은 우리의 통일 과정에 있어 완충지대로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래서 내가 제한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몽골에 탈북자들의 난민촌을 건립하자는 것이다. 아직은 요원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수년전 몽골의 인권위원장이 한국에 와서 우리 공동체를 찾아왔을 때에 나는 그에게 탈북자들의 인권을 이야기하면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당신은 지금 우리나라에 들어온 몽골인들의 인권문제에 관심이 있어 여기에 오셨지요. 맞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좁은 땅에서도 3만 명이 넘는 몽골인들과 함께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들을 돕고 있습니다. 몽골인 근로자들뿐만 아니라 보시다시피 여기 몽골아이들을 위해 학교까지 세워 보살피고 있습니다. 몽골 정부가 지원해서 만든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나도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현재 몽골에 들어가는 북한 이탈주민들의 인권과 생존권에도 관심을 가져 주십시오."

 

나의 이 말에 몽골 인권위원장의 얼굴이 바뀌었다. 놀라는 눈치였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몽골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사랑과 관심만큼 몽골에 들어가는 탈북 난민들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도와달라는 부탁이었다. 이것이 어찌 무리한 이야기인가? 나는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제안은 분명히 몽골을 움직일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 언젠가는 더 강하게 나의 생각을 전달하고픈 마음이 있다. 그래서 반드시 남북통일과정에서 나타날 많은 이탈주민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완충지대로 몽골을 활용하려고 한다. 그때를 위해서라도 지금 우리의 사역은 더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누가 이 사역을 이해할 수 있을까마는 그럼에도 나는 멈추지 않고 나아간다. 이것은 미래 우리나라와 우리 자손들이 살 수 있는 길을 개척하는 것이라 믿고 있기 때문이다.

 

인생에도 전환점이 있듯이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도 전환점이 있다. 몽골학교는 그런 의미에서 매우 특별하다. 지금까지 학교가 성장해 오면서 여러 번의 전환점을 맞이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때로 위기라는 이름으로 찾아왔지만 그 위기는 언제나 기회를 동반했으며 우리는 그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축복을 받았기 때문이다. 어려움이 있을 때에 그 어려운 문제 안에는 비밀한 축복과 은혜의 기회가 숨기어져 있었다. 문제는 기회의 또 다른 이름에 불과하다. 우리는 문제를 통하여 성장했으며 문제를 풀어가면서 상상하지 못한 은총을 받았다. 그러므로 문제 안에 답이 있고 그 답은 반드시 새로운 전환점이 된다. 마치 정호승 시인이 '벽안에 문 있다'고 한 것처럼 우리는 감당 못할 고난을 당했지만 오히려 그 고난의 시간이 우리를 여기까지 올 수 있도록 만든 가장 큰 에너지가 되었다.

 

구로공단에서 몸도 마음도 병들어 성수동 뚝섬지역으로 사역의 현장을 바꾼 것은 내 인생의 새로운 전환점이 되었다. 소망교회의 도움으로 쉽게 사역하고 살아갈 수 있었던 상황에서 갑자기 고통의 구렁텅이로 추락하면서 나는 드디어 내 이름을 찾았다. 유해근 이라는 내 이름과 삶을 걸고 새롭게 삶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전까지는 누구의 어느 교회에 소속된 이름 없는 목회자에서 이제는 당당하게 내 이름을 걸고 주체적으로 사역하는 새로운 삶으로 바뀐 것이다.

끌려가는 사역이 아니라 내가 주체적인 존재로 만들어가고 그것에 대하여 책임적 존재로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은 큰 변화다. 나는 이제 달라져야 했다. 왜냐하면 모든 것에 내 이름을 걸고 삶을 헌신해야 했기 때문이다. 구로동에서 뚝섬지역으로 사역의 현장이 바뀐 것은 단순한 공간의 변화가 아니라 사역에 대한 내 태도가 바뀐 것을 의미한다. 이제는 나섬의 사역이 내 삶의 일부분이 아니라 전부가 되었기 때문이다. 가난했지만 행복할 수 있었던 것도 나름 그러한 변화 때문이다. 남의 사역을 돕는 자리가 아닌 내 사역을 한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져다 준 것이다. 나는 지금 후배들을 만나 조언을 해주는 기회가 오면 자기의 이름을 걸고 사역을 해야 한다고 말해준다. 그래야 힘이 들어도 그것이 자신의 사역으로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구로동에서 병들어 나올 수밖에 없었던 일은 소중한 전환점이자 축복의 통로였다. 그때에 내 마음을 아프게 했던 모든 일들과 얼굴들도 그래서 이제는 웃으며 잊을 수 있는 것이다.

또 한 번의 전환점은 뚝섬에서 쫓겨나 강변역 인근 건물의 지하실로 옮긴 사건이다. 1997년 뚝섬역에서 이주민 사역을 할 때에 만약 그 교회가 나에게 나가지 말고 오래오래 여기서 죽을 때까지 사역을 하라고 공간을 내주고 여러 가지로 협조를 해주었다면 오늘의 나섬과 몽골학교는 없었을 것이다. 감사하게도 나가라고 내 등을 떠민 것은 알고 보면 은총의 시작이었다. 쫓겨날 때는 슬프고 아프고 괴롭고 기분 나쁘고 어떻게 헤야하는가 막막하고 복잡했었다. 돈 한 푼 없이 집밖으로 쫓겨나는 신세는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그렇게 쫓겨났기 때문에 우리는 강변으로 이사를 했고 아무 대책도 없이 도전할 수 있었다. 아무 것도 없었음으로 믿음이 생겨났고 누구에게도 하소연 할 사람이 없었음으로 하늘에 기도할 수 있었다.

돈 한 푼도 없이 살아가는 방법도 그때에 배웠다. 하나님 나라 사역의 비밀한 전략도 나는 그때에 배웠다. 무조건 저질러야 한다는 것을 체험한 첫 경험이었다. 문제가 축복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된 것도 그 때의 일이다. 강변역 시대는 나섬과 몽골학교의 사역에 있어 가장 잊을 수 없는 시간들이다. 나는 그때를 잊을 수 없다. 문제를 즐겨야 미래가 있다. 문제는 문제가 아니라 새롭게 성장하고 변화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다. 위기가 있어야 새는 하늘을 난다. 바람이 불어야 새는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간다. 태풍은 위대한 선장을 만든다고 한다. 비바람이 몰아칠 때에 사람들은 배를 끌고 육지로 올라가지만 누군가는 거꾸로 배를 몰고 바다로 간다. 그래야 멀리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위기를 기회로 붙잡는 사람이 위대하게 쓰임 받는다. 두려워 할 것은 하나도 없다. 두려움과 공포는 모두 가짜 신이다. 가짜가 우리를 죽일 수 없다. 문제는 가짜다. 진짜는 문제 안에 숨겨 있는 하나님의 의도다. 문제는 두려움으로 포장되어 나타나지만 실제로 문제는 문제가 아니다. 그 안에는 진짜 보석 같은 축복이 숨겨 있음을 보아야 한다.

뚝섬의 교회에서 나가라는 통보는 더 강한 미래를 보장하는 출발이 되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감사의 조건이다. 고난이 감사의 조건이 될 수 있음은 그 고난을 감사의 삶으로 바꾼 이들만이 고백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고백이다. 나는 이제 그렇게 고백할 수 있다. 눈의 시력을 잃은 것도 감사이고 교회에서 쫓겨나 강변으로 올 수 있었던 것도 감사다. 모든 것이 감사다. 버릴 것 하나 없는 인생이다. 삶은 그래서 살만하고 아직 우리의 인생은 아무도 모른다.

세 번째는 몽골학교를 하면서 맞이했던 수많은 문제들이 오히려 축복이 된 일들이다.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니었음으로 문제라고 말하는 것도 사실은 적절한 것은 아니지만 어찌되었든 몽골학교가 여기까지 오면서 맞이한 수많은 일들이 몽골학교와 나섬의 사역을 더 멀리 갈 수 있도록 만든 에너지였다.

공간이 부족했음으로 다른 곳으로 옮겨 더 많은 아이들이 올 수 있는 기회가 되었고 학교를 인가 받아야 했던 순간들이 그 이후의 사역에 있어 새로운 전환점이 될 수 있었다.

당장은 힘들고 괴로운 일이지만 알고 보면 그것이 바로 축복이다. 지금은 그 문제의 의미를 모르고 있지만 곧 알게 될 것이니 그날은 감사할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삶을 저주하지 말아야 한다. 절망하지 말아야 한다. 절망이 은혜로 고백될 날이 올 것을 믿고 열정적으로 문제를 풀어 나가야 한다. 그것만이 나를 향하신 하늘의 뜻을 성취하는 삶이니 말이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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