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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마드 이야기

   
굿모닝몽골14 아버지와 나 그리고 몽골학교(2)

요한복음 1:16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아버지 장로님은 나와 몽골에 가는 것을 정말 좋아하셨다. 한번은 몽골문화원 이사진과 몽골의 울란바토르를 방문한 김에 홉스골 호숫가를 가게 되었다. 울란바토르에서 비행기를 타고 무릉이라는 곳에서 다시 지프차를 타고 서너 시간의 비포장도로를 달려 홉스골 호숫가에 도착, 다시 배를 타고 한 시간 반 이상 호수를 건너면 우리가 묵을 캠프가 있었다. 서울에서 울란바토르로 다시 무릉의 공항까지 비행기를 타고 비포장 도로를 달려 호숫가까지 가는 여정이란 정말 힘들고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우리 몽골 문화원 이사진의 평균 연령은 70세가 넘는 어르신들이라 걱정이 되고 불안하기도 했다. 고령의 이사님들이 함께 가는 그 긴 홉스골 여행길에 기막힌 일이 일어났다. 배를 타고 홉스골 호숫가를 건너가는데 갑자기 아버지 장로님이 준비한 오이 100개가 등장하였다. 아버지께서 직접 농사를 지어 수확한 오이를 서울에서부터 가지고 오신 것이다. 우리 집 앞마당에서 키운 무농약 오이다. 그 맛이란 얼마나 기막히던지! 목이 마르고 배가 고플 즈음 한적한 홉스골 호수를 건너는 우리만의 배안에서 먹었던 그 환상적인 오이 맛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모두들 감탄사를 연발하였다. 어떻게 서울에서부터 오이를 가지고 오실 생각을 했을까? 아버지는 그 별 볼일 없어 보이는 오이를 집에서부터 준비해 오신 것이다.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이런 것이라며 말이다. 누가 상상할 수 있었을까? 설사 가지고 올 수 있다하더라도 어떻게 가지고 오는가 말이다. 귀찮고 부끄러워서도 가지고 올 엄두를 낼 수 없었을텐데 아버지는 당신이 조금 수고하면 모두들 행복해 할 것을 상상하고 가지고 오신 것이다. 그날의 오이는 내 인생에서 잊을 수 없는 감동이었다.

아버지는 나와 몽골에 간다면 무척 좋아하셨다. 초원을 함께 걷고 조랑말을 타면 마치 어린아이처럼 좋아하셨다. 농사꾼이며 노동자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셨던 아버지의 소박함을 나는 사랑했고 아버지는 나의 유목민에 대한 철학과 이야기를 듣는 것을 좋아하셨다. '그렇구나!' 하시면서 마치 큰 깨달음을 얻은 사람처럼 내가 들려드리는 유목민에 대한 역사와 철학 강의를 좋아하셨다. 나는 아버지가 내 강의를 좋아하시니 더 신이나 강의를 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정말 아버지는 내 유목민 강의를 사랑하셨다. 아버지가 좋아하면 모든 이들이 내 강의를 좋아하는 줄 알고 정말 열심히 이야기를 했다. 몽골 선교에 대한 나의 비전을 말하면 아버지는 유독 공감하며 박수를 쳐 주셨다. 아버지는 몽골을 나만큼이나 사랑하셨고 그래서 몽골학교 건축이 이루어지기를 얼마나 기도하셨는지 모른다.

 

200812월에 시작된 몽골학교 건축 논의는 아버지의 큰 관심사이며 기도 제목이었다. ‘언제나 몽골학교 건축이 이루어질까?’ 항상 학교 부지를 바라보며 기도를 하셨다. 몸이 편찮으셨음에도 시간이 날 때마다 아차산 중턱의 부지를 찾아가셨다. 그것은 마치 가나안을 바라보는 모세의 눈길같았다. 사십년을 한결같이 가나안을 생각하며 광야를 걷던 모세의 마음으로 아버지는 나섬과 몽골학교를 사랑하셨다.

그리고 드디어 몽골학교 건축이 시작되었다는 소식에 가장 기뻐하셨던 분이 바로 아버지 장로님이다. 단 하루도 빠짐없이 아차산 중턱의 학교 부지를 오르락내리락 하시며 좋아하시던 그 모습이 지금도 생각난다.

기공예배를 드리던 날도 아버지는 맨 뒷자리에서 조용히 기도를 하셨을 거다. 앞에 나서지 않는 겸손하고 조용한 분이셨음으로 아버지는 늘 뒷자리를 지키셨다. 다른 이들에게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늘 당신의 자리를 지키시던 아버지는 기공예배를 드리고 곧 입원하셨다. 며칠 동안 기운이 없다며 드시지도 못하고 누워계시던 아버지는 그렇게 마지막 길을 가셨다. 병원에 입원하고 불과 20여일 만에 천국으로 훌쩍 떠나가셨다. 아버지가 떠나가시기 바로 며칠 전이었다. 병원에 찾아뵈었던 그날이 내가 아버지와 마지막으로 대화를 나누었던 날이다. 조용히 앉아계시던 아버지는 내가 가니 내 손을 잡고는 몇 마디를 남기셨다.

 

"잘 될 거다! 더 크게 될 거다!"

 

이것이 나에게 말씀하신 아버지의 마지막 유언이다. 아마도 내가 사는 동안 가슴 가장 깊숙한 곳에 새겨질 유언이다. 아니 아버지의 마지막 바램이다.

2014224일 새벽 아버지 장로님은 그렇게 하늘나라로 올라가셨다. 그토록 보고 싶던 학교 건축의 시작만 보시고 그대로 떠나시고 말았다. 아버지의 발인예배를 마친 후 나는 아버지의 영정사진을 들고 학교건축 현장을 돌았다.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마는 그럼에도 아버지의 간절한 기도를 내 가슴에 묻어두기 위해서라도 그 맨 땅을 돌고 싶었다. 반드시 아버지의 간절한 소망이던 몽골학교 건축을 마치겠노라 다짐하면서 말이다. 그날 그 학교 부지에서 나는 많이도 울었다. 너무도 아쉽고 안타까워 눈물이 쉬지 않고 흘렀다. 아버지의 소원이었을 몽골학교 건축을 다시 한 번 다짐하였다.

아버지 장로님의 기도는 천국에서도 쉬지 않았나보다. 정말 신기하게도 날씨가 받쳐주니 건축이 쉬지 않고 이루어졌다. 공사하는 사람들이 쉴 수 없을 정도로 날씨가 좋았다. 여름장마가 시작되었음에도 보기드믄 마른장마란다. 비가 오지 않는 마른장마가 우리를 도왔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비가 오지 않아 미안하지만 우리에게는 참 고마운 일이었다. 여름 내내 거의 비가 오지 않아 공사는 척척 진행되었다. 그래도 공사기간을 맞추는 것은 무척이나 힘든 일이었다. 물론 공사비는 더 큰 기도제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모든 공사는 기도하던 대로 이루어졌다.

 

20148월 말이다. 문제는 91일 준공검사가 나고 교육청에서는 학교이전허락이 떨어져야 한다. 그래야 새 학년이 시작되고 정상적으로 고등학교 과정의 학생들이 입학할 수 있다. 하루 차이로 일 년이라는 시간이 아무런 의미 없이 흘러갈 수 있었음으로 나의 마음은 타들어가고 있었다. 공사기간을 줄여야한다. 밤을 새워서라도 반드시 준공검사가 나와야 한다. 그러나 세상일이 모두 내 맘 같지는 않았다. 문제는 건축사가 전혀 협조를 하지 않는 것이었다. 희한한 사람이다. 돈만 요구하고 조금도 협조를 하지 않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건축사를 만나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모른다. 우리의 입장에서 볼 때 그 사람은 학교 건축에는 관심이 없고 건수만 생기면 추가비용이라면서 돈만 요구하는 거다. 그 건축사를 소개한 사람에게 전화를 하고 어떻게 이런 사람을 소개하였느냐며 울고불고 난리를 쳐도 소용이 없다. 공사기간은 물론이고 준공검사니, 학교 이전승인이니 하는 절차적 과정을 마친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이제 방법은 딱 한가지다. 구청장의 결심만이 우리를 도울 수 있다는 판단이 섰다.

 

무조건 구청장실을 찾아갔다. 구청장님은 나와는 오랜 인연이 있다. 부구청장 시절부터 몽골학교와 몽골문화원 설립 등의 문제를 도우셨던 분이기에 간곡하게 도움을 요청해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구청장님을 만나 이야기를 시작하려는데 갑자기 눈물이 났다. 눈물을 흘리면서 우리의 입장을 설명했다.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를 이야기 하였다. 공사는 마무리가 되지 않았다는 것과 그럼에도 나는 준공검사를 받아야 한다는 것. 준공검사가 나와야 교육청에서는 학교이전 허락이 나고 정상적으로 91일 개교를 할 수 있다는 것까지 그대로 솔직하게 이야기를 했다. 계속해서 눈물이 흘렀다. 간절하고 절박했다. 정말 죽어서라도 학교의 문제만큼은 해결하고 싶었다. 도와달라고 부탁을 했다. 구청장님의 결심만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했다.

내 이야기를 다할 때까지 구청장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다. 나는 눈물을 훔치면서 끝까지 도와달라고, 도와주시지 않으면 학교 건축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간곡하게 도움을 요청했다. 구청장님은 불교신자라 들었다. 나는 목사다. 그분이 굳이 우리를 도와주어야 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평소 구청장님은 몽골학교에 대하여 대단한 관심을 갖고 있음을 익히 알고 있었음으로 마지막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내가 책임질 테니 공사가 끝이 나지 않더라도 학기가 시작될 수 있도록 우선 준공검사 하세요."

 

기적이 일어난 거다. 건축 준공검사는 한두 가지의 검사가 아니다. 학교 건축과정에서 일어나는 모든 분야에 걸쳐 각 과의 과장들과 실무자들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가스, 청소, 전기, 환경, 교통 등등. 학교 건물이니 안전은 물론이고 학교 외곽의 정원수 숫자까지 조금만 문제가 보이면 무조건 보류라는 이야기를 들었던 터라 구청장님의 그 말 한마디는 하나님의 음성처럼 들렸다. 그 후로 구청의 모든 실무자들이 일사천리로 도움을 주었다. 역사상 준공검사를 이렇게 받아낸 사람은 없다고 했다. 불과 하루 사이에 모든 부서의 결제를 다 받아냈다. 서울시는 구청에서 준공검사를 받으면 서울시에서도 준공허락을 해준다 했다. 교육청에서는 준공검사만 나오면 그 자리에서 학교이전 승인을 해 주겠다며 미리 서류를 만들어 놓았다 했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준공검사를 받고도 공사가 마무리 될 때까지는 한참이나 시간이 흘러야 했다. 준공검사와 학교 개교를 마치고 난 날 저녁 나는 아내도 모르게 감사의 기도를 드리며 울었다. 울고 또 울면서 하나님께 감사했고 돌아가신 아버지께 감사했다.

 

이건 천국에 가신 아버지가 하나님께 간절하게 부탁을 했기 때문에 일어난 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 장로님이 몽골학교 건축을 너무도 사모하셨기 때문에, 그리고 나를 너무너무 사랑하셨음으로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해 921일 토요일, 큰아들 영규가 몽골학교 강당에서 결혼식을 했다. 많은 하객들이 축하를 해주기 위하여 몽골학교를 찾았다. 불과 열 달 만에 아차산 중턱 아카시아 나무만 가득했던 야산 위에 번듯한 몽골학교가 세워지고 처음으로 우리 아들의 결혼식이 거행된 것이다. 모두들 놀라워했다. 나는 눈이 보이지 않았음으로 마음으로 그림을 그렸다. 결혼을 하는 아들과 며느리의 모습도 보고 싶고, 학교건축을 놀라운 눈으로 구경하는 이들을 보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볼 수가 없다. 정말 나는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다.

그래도 좋았다. 천국에서 아버지가 얼마나 좋아하실까를 생각하니 나도 덩달아 좋았다. 아버지와 나는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는 처지였지만 아마 가장 행복한 날이었다.

 

학교 이전을 마치고 학교 주변 울타리에 장미나무를 심었다. 얼마 전에는 포도나무도 심었다. 장미랑 포도나무랑 어울리는 정원과 터널을 만들고 싶어서다. 옥상에는 햇빛발전소를 세웠고, 버섯농장을 만들었으며, 벌통을 가져다 놓으니 벌들이 날아다닌다. 옥상 텃밭을 만드니 야채가 자라고 빵 굽는 시설을 만들어 아이들에게 제빵 기술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학교를 옮기니 아이들이 전국에서 몰려오기 시작했고 금새 300명이 넘는 큰 학교가 되었다.

 

아버지의 꿈이 이루어졌다. 이것은 아버지의 꿈이었고 나의 꿈이었다. 아버지가 좋아하실 것을 생각하면 너무도 행복하다. 나의 행복이 아버지의 행복이었고 나의 꿈이 아버지의 꿈이었으므로 우리 부자의 꿈은 이렇게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창세기 18:11~15

아브라함과 사라가 나이 많아 늙었고 사라의 경수는 끊어졌는지라.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사라가 두려워서 승인치 아니하여 가로되 내가 웃지 아니하였나이다. 가라사대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하시는 말씀은 언제나 내게 큰 힘이며 위로다.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가장 소망하던 것은 아들을 얻는 것이었다. 그것이 그들의 유일한 바램이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들의 아들에 대한 소망과 기도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나이 90세를 넘도록 아무런 소식이 없던 그들 부부에게 어느 날 야훼 하나님께서 찾아오시더니 아들이 있을 것이란다. 뜻밖의 소식을 접한 사라가 그만 장막 뒤에서 그 이야기를 듣던 중 웃고 말았다. 여기서 웃었다는 말은 비웃었다는 말일게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미 생리가 끝난 늙은 나이였음으로 더 이상 소망이 없었을 것이다. 합리적으로 조금만 생각해보면 그것은 불가능하다. 과학도 필요 없다. 나이 90세가 넘은 여성이 아이를 낳을 수 있는가? 어느 누구도 나이가 90살이 넘은 여성이 아이를 낳는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사라 자신도 아들이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는 믿을 수 없었다. 그러니 웃을 수밖에...

그때에 여호와께서 사라에게 나타나시며 하시는 말씀이 놀랍다. '내게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실상 그것이 현실적인 자신의 문제로 나타나게 될 때면 슬그머니 꼬리를 내린다. 내게 무슨 그런 기적이 일어나겠는가 하는 의심과 함께 말이다.

 

몽골학교는 진정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에게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드러난 사건이며 기적이 역사다.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모든 이들을 부끄럽게 만든 일이었으며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지를 보여준 간증거리다. 그 모든 것의 이면에 아버지가 계셨다. 내 자신의 기도보다 더 많은 아버지의 기도가 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기도는 하루도 쉬지 않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어머니는 단 하루도 쉼 없이 새벽마다 나와 나섬 그리고 몽골학교의 모든 사역을 위하여 기도하고 계시다.

 

나는 지금 이 글의 마무리를 인도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쓰고 있다. 그런데 자꾸만 눈물이 난다. 아버지 장로님이 그리워 눈물이 난다. 보고 싶다. 아버지가 정말 보고 싶고 사랑한다고 말씀 드리고 싶다. '아버지 사랑해요. 그리고 너무너무 보고 싶어요.'*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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