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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마드 이야기

   
노마드톡217 패러다임의 변화와 교회의 개혁

 

나는 패러다임의 변화라는 말을 좋아한다. 그래서 나와 나섬의 모든 사역에도 그 패러다임의 전환을 이루기 위하여 쉼 없이 고민하고 도전한다. 패러다임의 전환이라는 말은 1962년 미국의 과학 철학자 토마스 쿤이 자신의 저서 '과학혁명의 구조'라는 책에서 처음 언급했다. 사실 역사는 패러다임의 전환을 모색한 이들로부터 진보하고 변화했다. 천동설에서 지동설로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이루었던 역사적 과정을 우리는 알고 있다.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발상의 전환을 이룬 이들이 이전의 고정관념을 바꾸지 않았다면 역사는 변할 수 없었다.

아날로그적 사고에 멈춘 이들은 디지털의 혁명을 상상하지 못했다. 생각이 멈추면 미래는 없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만약, 1517년 마틴 루터의 생각과 결단이 없었다면 오늘날 개신교는 존재할 수 없었다. 여전히 카톨릭의 종교권력과 기득권을 용인하면서 교회다움을 상실한 채로 명맥만 유지하였을 것이다. 아니 교회는 아예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종교개혁의 기치를 들었던 이들의 삶과 헌신이 오늘의 개신교는 물론이고 카톨릭까지 개혁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교회의 패러다임을 바꾸지 않으면 한국교회의 미래는 없다. 지금의 교회구조와 문화로는 21세기 엄청난 속도로 변하는 세상을 따라갈 수 없을 뿐만아니라 엘빈 토플러가 말한 속도의 충돌을 야기할 수밖에 없다. 속도의 충돌은 결국 교회의 폭망을 의미한다. 교회는 이미 미래 지구상의 살생부에 이름을 올렸는지도 모를 일이다. 실제로 교회의 미래는 암울하다. 미래 학자들의 공통적 견해는 종교의 해체시대가 오고 있다는 것이다. 교회가 급속도로 노령화되고 젊은이들을 비롯한 다음세대가 교회를 떠나는 현실은 교회의 미래와 무관하지 않다. 패러다임의 변화와 교회의 혁명적인 개혁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다.

교회의 대형화를 지양하고 작지만 강한 교회를 만들어야 한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인구 800만 명의 작은 나라다. 전세계 인구의 0.25%도 되지 않는 작은 나라다. 그러나 그들은 노벨상의 35%를 차지할 만큼 엄청난 민족이기도하다. 자원도 없다. 석유가 나지 않는 중동국가이니 오히려 그들은 그런 결핍을 새로운 기회로 바꾼 민족이다. 위기를 기회로 붙잡고 그것을 오히려 자신들의 장점으로 만들었던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스라엘에는 제조업이 없다. 인구가 적으니 내수시장을 노리고 제조업을 할 이유가 없다. 반대로 새로운 미래 산업의 기술과 혁신적인 아이디어로 부자가 되었다. 애플의 아이폰이 성공한데는 이스라엘의 기술과 아이디어가 절대적이었다. 이스라엘 없이 세계 산업사회는 존속할 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작지만 강한 국가를 이룬 이스라엘은 어떤 국가도 함부로 할 수 없는 강력한 나라가 된 것이다. 한마디로 히든 챔피언이다.

교회의 대형화에 대한 유혹은 어쩔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을 용인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다. 목회자들이 그 유혹에서 자유로워져야 한다. 이스라엘처럼 작지만 강한 공동체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가져야 한다. 미국의 세이비어 공동체와 같이 작지만 강한 공동체를 꿈꾸어야 한다. 유연하고 창조적이며 도전적인 작은 공동체가 곳곳에 생겨나야한다.

 

대형화의 유혹에서 벗어나게 하는 혁신적 제안은 헌금의 공유화다. 헌금은 어느 교회의 소유물이 아니다. 헌금은 오직 하나님의 것이며 한국교회 모두의 공유물이다. 그렇게 해야 최근의 비자금과 같은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것이고 교회를 더 크게 하려는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어린 시절 농어촌의 작은 시골교회에서 신앙생활 하던 아이가 장성한 후, 서울의 대형교회에 다니며 드린 십일조가 왜 대형교회만의 전유물이어야 하는가? 작은 개척교회에서 전도하여 교인이 된 사람이 여러 이유로 대형교회로 옮겨 드린 십일조가 왜 그 대형교회만의 소유가 되어야 하는가? 한국교회에 한명의 신앙인이 키워졌다면 한국교회의 모든 목회자, 즉 작은 시골교회에서부터 지하의 개척교회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헌신하고 노력하여 만들어진 열매다. 그런데 대형교회가 그 모든 것을 소유하고 그것이 차고 넘쳐 비자금을 만들고 목회자가 임의로 사용한다면 그것은 엄밀히 헌금일 수 없다.

왜 교회를 키우려 하는가? 솔직히 그것은 모두 헌금과 관계되어 있다. 더 많은 헌금을 얻기 위하여 교회는 전도라는 것을 하기 시작했다. 복음이 미국에 들어가 시장이 되었다고 하는데 그 시장의 원리를 교회와 기독교가 수용하면서 자기 교회를 키워야 헌금이 들어오는 액수가 커지고 그것은 곧 시장에서 힘을 의미하고 권력을 말하는 것이므로 우리는 전도를 시작했다.

미국의 교회가 한국교회로 들어오면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전도라는 것을 통하여 교회의 경쟁체제를 받아들여야 했다. 그 결과가 대형교회다. 경쟁에서 이겼는지는 모르지만 어째든 교회는 시장경제처럼 피차 경쟁의 정글 속에서 누구는 대형교회가 되었다.

그러나 그 이면으로 들어가 조금만 세밀하게 들여다보면 우리가 만들려는 이 엄청난 대형화의 유혹은 결코 복음적일 수 없다.

독점과 소유의 교회는 예수가 말하고 가르친 교회가 아니다. 교회의 머리는 예수이며 그 예수는 우리에게 나눔과 공유의 가치를 가르쳐 주신 분이다. 소유와 독점의 교회에서 나눔과 공유의 교회로 패러다임을 바꾸어야 교회가 산다. 그 공유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하여 나는 십일조 나눔재단과 같은 공유경제의 원리를 교회가 도입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한국교회에서 헌금의 공유는 혁신적인 문화를 이루어야만 가능함을 안다. 그럼에도 그 길만이 우리가 사는 길이다. 헌금의 전적 공유가 힘들다면 일부의 헌금만이라도 한국교회 전체가 관리하고 공유하여 가장 필요한 선교와 구제에 쓰여져야 한다. 공정하고 투명하게 사용할 수 있는 시스템을 도입한다면 교회의 대형화에 대한 유혹과 문화는 사라질 수 있다. 어떻게 교회가 그리 크고 대형화된 힘을 유지하고 지키기 위하여 스크린으로 예배를 드리고 나아가 각 지역에 지점교회를 두며 결국 세습이라는 용납할 수 없는 일들을 저지른단 말인가!

 

목회자의 힘은 교회에서 나온다. 목회자는 교회의 크기로 권력을 소유한다. 그 힘은 곧 대형교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을 만들고 그 딜레마가 악순환 되면서 현실적인 딜레마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다. 한 목회자의 건강하고 성숙한 철학은 교회를 개혁하고 바꿀 수 있는 가장 좋은 길이다. 그럼에도 오늘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에게 그런 자유함과 성숙한 영성을 요구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한국교회의 문화와 현실의 문제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한계 때문이다. 대부분의 교회는 몸집을 키우고 싶어하며 특별히 제도권의 주류교회는 장로들을 비롯한 교회의 구성원들이 경쟁과 성장과 부흥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교회의 구성원들이 목회자의 능력을 교회의 성장과 부흥을 통하여 가늠하려는 태도를 갖고 있는 한 결코 기존의 패러다임을 바꿀 수 없다.

 

 

이제는 깨어있는 교인들에 의한 아래로부터의 혁신과 개혁을 기대할 수밖에 없다. 적은 수일지라도 깨어있는 성도들의 변화에 대한 노력과 결단이 필요하다. 할 수 있다면 작은 교회에 출석하고 부득불 대형교회를 나가야 한다면 십일조는 보다 공정하고 의미있게 사용될 수 있는 공적기관에 하는 것이 필요하다. 한국교회 십일조 나눔재단을 만드는 것이 요원하다면 공적 영역에 사용될 수 있는 곳을 찾아야 할 것이다.

 

교인 빼앗기와 전도가 어떻게 다른가? 논쟁의 여지가 많겠지만 전도와 한국교회의 문제는 동전의 앞뒷면처럼, 야누스의 얼굴처럼 이중적이라고 생각한다. 깊이 생각하고 다시 결단해야할 문제다. 과연 교회가 시장과 무엇이 다른가? 시장의 논리가 교회의 전도, 나아가 성장논리를 제공했다면 이제 교회는 처음 본질로 돌아가야 한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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