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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마드 이야기

   
노마드톡225 다시 십자가에 달린 예수, 십자가에 못 박는 교회

   

  시장이 되어버린 교회

 

지금 교회는 백화점에 전시된 상품들처럼 자신을 뽐내며 시장에 나선 이들의 선택을 기다리는 물건이다. 종교라는 딱지를 붙인 전형적인 종교 시장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저 종교 소비자의 눈에만 잘 띄면 된다는 시장의 논리가 지배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교회는 시장이 되었다. 어느새 기독교와 교회 그리고 소위 영적이라는 가치는 한국교회라는 시장의 전시물이 되었다.

텔레비전을 틀어 기독교 방송 채널을 돌려 보면 대형교회 또는 잘나간다는 목회자들의 설교방송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들은 모두 자신을 뽐내며 우리 교회가 최고라 말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그 방송을 보는 이들에게 빨리 자신의 교회로 나오라고 손짓을 한다. 그렇게 말을 하지는 않지만 속은 그런 욕망으로 충만해 보인다.

그 설교방송은 어김없이 돈을 주고 시간을 산다. 그래서 가장 많은 이들이 보는 시간대의 가격은 가장 비쌀 수밖에 없다.

그러니 기독교 채널의 모든 설교방송은 돈이 많아야만 출연이 가능하다. 대형교회나 돈이 많은 교회와 목회자 외에 설교방송에 출연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거금을 주고 배팅을 할 수 있는 이들이 있을 수는 있다. 철저히 자본의 힘과 자신의 종교 상품에 대하여 자신 있는 이들만이 할 수 있을 것이다.

교회의 시장화는 이제 숨길 수 없는 현실이 되었다. 하긴 기독교가 로마에서는 제도가 되고, 유럽에서는 문화가 되었으며, 미국으로 옮겨와서는 시장이 되었다고 하지 않던가. 한국에 와서 기독교는 대형교회가 되었다. 그래서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은 딱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고 한다. 하나는 대형교회 목회자요, 다른 하나는 대형교회를 지향하는 목회자라며 이를 조롱하는 이들도 있다. 기분은 언짢지만 이는 사실일 수도 있다. 솔직히 나도 그런 구분에 대하여 아니라고 말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신학교에 다닐 때부터 아니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을 때부터 교회는 부흥과 성장이라는 목표를 쉼 없이 말해왔던 것 같다. 마치 교회의 존재목적은 성장하고 부흥해서 큰 교회가 되는 것인 양 말이다. 그러니 교회를 키우고 성장시켜 더 큰 교회, 나아가 더 큰 예배당을 신축하는 것이 교회와 목회의 성공이라는 등식은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신앙인들에게 각인된 이데올로기다.

우리는 그런 토양에서 교회를 다녔으며 그런 이데올로기에 경도된 목회자들로부터 교회는 부흥과 성장이 전부라고 배웠다. 무조건 부흥시켜놓고 말해야지 교회도 성장시키지 못하고 말만 앞서면 그것은 비굴한 변명이라고 자연스레 학습되었다. 그렇게 교회와 목회자의 성공조건은 큰 교회이며 부흥시키는 목회자라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그런 고정관념을 갖고 신학을 시작한 나는 신학교에서마저 제대로 된 교회와 바람직한 목회자의 조건에 대하여 배울 수 없었다. 오히려 신학교의 모든 건물에는 그 건축물을 세워준 어느 교회의 이름이 당당하게 붙어 있었고 채플에는 그 교회 목회자의 이름이 새겨 있었다. 미래의 교회와 목회자의 꿈을 꾸는 이들에게 브랜드가 되어버린 교회와 신화가 되어버린 목회자의 이름은 다시 그들이 지향하는 교회와 목회자로 마음에 새겨졌다.

신학교 교수들마저 주일날이면 큰 교회의 협동목사라는 이름으로 큰 교회로 찾아간다. 학생들은 책을 통해 공부하는 것보다 주변의 환경과 선생님들로부터 살아있는 공부를 한다. 한국교회를 지배하는 모든 환경과 조건은 대형교회와 성공한 목회자에 대한 왜곡된 신화로 가득하다. 그런 조건에서 신학생들은 다시 큰 교회를 지향하고 학교를 다닐 때부터 아예 그런 큰 교회에 전도사로 나아가 큰 교회의 목회자가 되는 것이 꿈이 되어버린다. 어떻게 하면 그런 큰 교회의 목회자가 될 수 있을지를 배우는 것이 잘사는 길이며, 그런 교회로 진출하려면 어디에 어떻게 줄을 대어야 하는지를 아는 것이 신학교의 분위기임은 결코 숨길 수 없는 현실이다. 대형교회의 카르텔에 들어가는 것이 성공한 목사요 교회라는 등식은 오늘 한국교회를 설명하는 분명한 사실이다.

교회의 크기와 목회자의 설교방송은 이미 교회 마케팅의 기본이다. 교회의 이름이 브랜드가 되고 브랜드가 된 교회에 참석하는 것이 마치 귀족 신앙인이 되는 차별의 조건이 되어버렸다. 명품 핸드백을 걸치고 거리에 나서면 사람들이 우러러 볼 것 같은 착각으로 비싼 가격에도 서슴없이 명품 핸드백을 사는 이들의 심리처럼 교회도 자신이 다니는 교회가 어떤 교회인지에 따라 교인들의 교회자랑이 제각각이다. 우리는 지금 한국교회 백화점에서 어떤 교회와 목회자가 명품인지를 구별하려는 이들의 선택을 기다린다. 이 교회는 경배와 찬양, 저 교회는 제자훈련, 이쪽 교회는 새벽예배, 저쪽 교회는 전도특공대와 같은 다양한 전도아이템으로 성장했다고 한다. 그들 앞에는 어떻게 하면 교회를 부흥시키고 자신도 성공한 목회자가 될지를 꿈꾸는 열등감으로 충만한 목회자들로 붐빈다. 그 틈새의 신자들은 어느 교회를 가야하나 하며 대형 브랜드의 교회와 목사들을 저울질한다.

백화점까지는 아니어도 작은 골목시장에서나마 자신의 교회 상품을 팔아보겠다며 이제 막 시작한 개척교회 목사들도 시장에 참여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자신의 종교상품을 판다. 어떻게 하면 한명이라도 더 자신의 교회로 끌어들일까하는 것이 모두의 한결같은 목표다. 여기서 이겨야 살아남는다는 절대 절명의 심정으로 교회시장에 참여한 이들을 나는 이제 말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이라는 사실을 말해야 한다.

 

  예수는 지금 여기에 없다.

 

예수는 시장이 되어버린 교회 안에서 살 수 없다. 그는 예루살렘 성전 같은 한국교회의 모습에서 자신의 가르침이 허무하게 왜곡된 사실 앞에 몸을 떨고 있다. 예루살렘 성전 앞에서 난장이 되어버린 성전의 처참한 모습을 보고 분노하신 것처럼 오늘 한국교회 시장 앞에서 분노하고 계시다. 대형백화점, 대형병원과 약국, 대형화되려는 자본주의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교회의 현실이 무섭다. 골목의 작은 가게들과 자영업자들이 망해 거리로 쏟아져 나와도 대형의 괴물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먹어 삼키기만 한다. 어떻게 하면 더 큰 몸집으로 키울 수 있을지에 대하여만 생각하는 이 단세포의 대형공룡들을 아무도 막을 수 없다. 이제 괴물이 되어버린 대형교회들은 자식들에게 그것을 세습하고 자랑스럽게 말한다. 우리의 성공을 폄훼하려는 열등감 많은 이들의 비난에 불과하다고 비판의 외침들을 침소봉대한다.

이런 아수라장의 교회에 예수는 없다. 난장이 되어버린 교회시장에 예수는 없다. 오히려 그런 교회의 시장에 예수가 나타나 채찍과 거친 욕설로 독사 같은 새끼들이라 말씀하신다. 회칠한 무덤 같은 놈들이라고 하신다.

 

그리고 예수는 다시 갈릴리로 가신다. 예루살렘 교회에 학을 떼인 예수는 그가 머물고 사역하던 갈릴리 민족에게로 다시 돌아가신다. 죽을 때까지 다시는 예루살렘에 오실 이유가 없다며 갈릴리로 가신다.

그리고 갈릴리 사람들에게 너희들이 복이 있다 하신다. 복은 큰 것, 화려한 것, 보기에 좋은 것이 아니라며 심령이 가난해야 한다고 하신다. 가난해도 너희가 복되다 하시며 그 갈릴리 사람들을 위로하시고 그들에게 구원의 기쁜 소식을 가르치신다.

 

지금 어디에 예수가 계실까? 도대체 어디에서 예수를 볼 수 있느냐 말이다. 예수 없는 교회를 만들어 놓고 예수가 거기 계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사기다. 예수 없는 교회를 교회라고 말하면 그리 말하는 이들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를 상품으로 만들어 시장의 물건으로 전락시켜놓고 예수를 팔아먹는 이들이 어찌 교회일 수 있으며 목사일 수 있는가?

 

온전한 기독교 언론과 신학교는 어디에 있는가? 한국교회의 시장화와 그 시장으로 몰려가는 기독교 언론과 신학교는 가라. 다시 기독교 대안언론의 출현이 시급하다. 돈 주는 교회의 홍보지에 불과하거나 그들의 카르텔 안에서 안주하며 먹고 살기에 급급한 언론과 신학교는 사라져야한다. 교회가 권력이 되고 그 권력을 세습하고 다시 적폐가 되려는 오늘날 교회에 대하여 우리는 분노하고 거부해야 한다. 그것만이 우리가 살길이다. 시장이 된 교회와 세습의 늪으로 모두를 끌고 들어가는 블랙홀이 되어버린 교회와 결별해야 한다. 차라리 다시 광야로 나가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 맞다. 광야를 두려워말고 광야로 나가자는 호세아의 권고를 들어야 한다. 예수 없는 교회이기보다 예수와 동행하는 광야가 옳다.

 

  예수 찾기, 예수 살기

 

좋은 교회의 연합과 연대의 시대가 다가온다. 마지막 남은 자와 그루터기의 때가 온다. 양과 염소로 다시 알곡과 쭉정이로 나누겠다던 주님의 말씀이 두렵다. 나섬의 길은 간단하다. 노마드 예수처럼 길 위의 교회다. 나섬 사람들은 길 위의 가치를 사랑하며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예수가 가르쳐 주신 것에 목숨을 걸고 그것만을 자랑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나는 이제 그 예수를 유일한 존재양식의 기준으로 삼고 가려고 한다. 그 기준이 곧 한국교회의 가야할 모델이고 목회자의 합당한 기준이다. 다시 예수를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예수가 기준이다. 큰 교회가 기준이 아니라 예수가 기준이다. 대형교회의 목회자가 기준이 아니라 예수가 기준이다. 예수가 기준이 되지 못한다면 그것은 가짜일 수밖에 없다. 예수를 찾고 그분의 삶을 따르는 교회들의 연합이 필요하다. 그래서 작지만 예수 닮아가려는 교회들이 많아야 한국교회가 산다. 대형교회가 많아지는 것이 아니라 작은 선교적 교회가 많아져야 한국교회가 건강해진다.

선교적 교회는 기본적으로 존재양식이 기존의 교회와는 다르다. 크기에서 콘텐츠로, 속도에서 방향으로 존재양식이 바뀐 교회다. 부흥이나 성장이라는 자본과 시장의 이데올로기를 거부하고 오직 예수의 가치로 새롭게 변화하는 교회다. 예수의 정신과 가치로 그 본질적 물음을 다시 묻는 교회가 선교적 교회다. 하나님을 사랑하듯 인간을 사랑하는 교회가 선교적 교회다.

나는 여기서 끝날 수도 있다. 괴물들의 습격이 나와 우리를 고통스럽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않겠다. 이미 많이 사랑받았고 충분히 쓰임 받았으니 무엇이 그렇게 무서울 것인가? 결국 예수를 죽인 것은 바리새인과 예루살렘의 제사장들이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교회였던 것이다. 오늘 그렇게 우리는 예수를 다시 십자가에 못 박고 있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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