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흔 아홉을 찾아가시는 주님 > 노마드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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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마드 이야기

   
아흔 아홉을 찾아가시는 주님


<아흔 아홉을 찾아가시는 주님> 

“너희 생각에는 어떻겠느뇨 만일 어떤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 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마태복음 18:12~14

6월 4일 ‘총력전도주일’을 앞두고 설교를 준비한다. 무슨 설교를 하여야 교인들이 전도를 자발적으로 할까 고민하다가 문득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나서는 목동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그렇지. 전도를 말할 때 흔히 잃은 양 찾기 운동하자며 본문을 인용하는 것을 본적이 있지’ 그랬다. 나도 여전히 그런 주류목사들의 한계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우리는 전부 아흔 아홉의 양 무리를 관리하고 싶은 욕심이 있다. 이왕이면 큰 교회 담임으로 성공한 목회자로 인정받고 싶은 것이다. 더구나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을 찾아나서는 목동의 무능함과 고달픔은 절대로 배우거나 본받고 싶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나도 마찬가지다. 

더 재미있는 것은 아흔 아홉을 키우고 관리하는 성공한 목사들은 나머지 잃어버린 양 마저도 자기가 차지하겠다고 그 외연을 확대하는 일에 전념하고 있다. 그래서 하는 일이 교회 주변은 말할 것도 없고 멀리까지 교회 버스 돌리기, 첨단의 위성방송으로 전국에 체인점 만들기, 그리고 염장지르기이다. 여기서 염장지르기는 좀 더 설명이 필요하다. 

염장지르기의 본질은 다름 아닌 겉과 속이 다른 말과 행동에 대한 것이다. 얼마 전 나는 아주 열심있는 대형교회 집사님을 만났다. 그분은 늘 자기 교회 담임을 칭찬하는 일에서부터 말을 시작한다. 그 집사님의 여러 간증(?)들중 진짜 염장지르는 말에 속이 뒤집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구토였다. 

“우리 목사님은 우리 교인들보고 다 다른 곳으로 나가라고 해요. 가난하고 없는 개척교회로 가라고해요. 그런데도 우리 교회는 한 주일에 새 교인이 수백 명씩 몰려와요. 정말 우리 목사님은 다들 다른 곳으로 나가라고 하는데도 말이지요”

이쯤 되면 내 속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화장실로 달려가야 한다. 참을 수 없는 가벼움과 치졸함에 구토가 나기 때문이다. ‘다들 다른 교회로 나가라고?’

웃기고 있다. 
정말 자기 교인들이 다른 약한 교회나 특수목회 현장으로 나가기를 바란다고? 아니다. 그건 거짓말이다. 그것이 거짓말인 이유는 간단하다. 만약 그 말이 진실이라면 그 목회자는 딱 몇 백 명 즉 자기가 할 수 있는 정도의 작은 교회당을 짓고 목회하여야 한다. 그렇지 않고 수천 명이 들어가는 교회당을 쉼 없이 지어가면서 교인들로 하여금 다른 곳으로 가라는 것은 모순이다. 제한된 공간만으로 목회하는 결단을 보여주어야만 그 말이 진실이다. 

아무리 많은 교인이 와도 수용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오고 싶어도 올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자기 양떼의 수를 제한하는 결단을 선언하고 그대로 교회건물을 지으면서 실천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만 그 말이 진실이다. 

그러나 정말 우리는 그러한가? 말은 나가라고 하면서 실제로는 교회주변 땅을 할 수 있는 한 다 매입하고는 다른 교회는 얼씬도 못하도록 엄청난 교회당을 짓는다. 왜? 교인이 많으니까? 

그렇게 지어진 교회는 또 채워야 한다. 채워서 넘치면 부수고 다시 더 큰 교회당을 지어야 한다. 그렇게 서너 번만 반복하면 그 교회는 주변의 작은 교회들을 접수하고 하나의 타운을 이룬다. 그리고 성공신화에 등극하는 것이다. 

‘우리 교회 오지 마세요. 제발 다른 교회 좀 가세요’ 
앞에서는 그렇게 소리를 지르지만 뒷구멍은 언제나 활짝 열려있다. 뒤에서는  부목사들이 들어오는 사람들 챙기느라 정신이 없을 것이다. 조직은 왜 그리 잘하는지... 구역부터, 목장, 순모임, 선교회 모임... 세상에 들어보지도 못한 모임들로 얽기고 설키여 도저히 도망칠 수 없도록 묶어 버린다. 조직으로 성공하는 것이다. 조직은 성공의 필수조건이다. 촘촘히 만들어놓은 그물은 한번만 들어오면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도록 완전하다. 
그리고는 나가란다. 이것이 코메디가 아니고 무엇인가?

능력은 조직력이다. 성공도 조직력이다. 그것은 맞다. 그러나 그렇게 성공하고 염장지르는 것은 옳지 않다. 차라리 입을 다물고 그저 가만히 있기만 해도 밉지는 않다. 이것이 염장지르기이다. 

이제 아흔 아홉의 목장은 그만두고 나머지 잃어버린 한 마리 양도 남겨놓지 않고 싹쓸이되고 있다. ‘잃어버린 양 찾기 운동’으로... 

이것은 현실이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그런 우리의 현실을 어찌하시고 다 말씀해 놓으셨다. 

본문의 맥락을 자세히 살펴보면, 예수님은 잃어버린 양을 찾아 아흔 아홉에 백 마리를 채우라고 하시는 말씀이 아닌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은 아흔 아홉 마리의 목장과는 별개로 한 마리의 양에 대한 기사다. 주님은 제자들이 ‘하나님 나라에서 누가 큰 자인가?’라는 논쟁에 대하여 설명하시면서 본문을 말씀하신 것이다. ‘작은 소자’에 대하여 관심을 갖는 것이 큰 자의 전제이다. 작은 자가 잃어버린 양 한 마리인 것이다. 그러니까 잃어버린 양을 찾는 것은 작은 소자 하나에 대한 목회적 관심을 의미한다. 

지금 잃어버린 양은 누구인가? 옆 교회 잘 다니는 교인들 끌어오기 아닌가? 그들이 말하는 잃어버린 양은 지금 다른 곳에서 잘 살고 있다. 옆 교회든 뒷집 교회든 잘 다니고 굳이 찾지 않아도 죽지 않을 만큼 밥 먹고 살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 

정말 잃어버린 양을 찾고자 한다면 다른 교회 잘 다니는 기존 신자들 데리고 올 생각이 아니라 가난하고 보잘 것 없어 미쳐 큰 교회에서는 머릿수에도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들 돌아보는 것이다. 그것이 정말 잃어버린 양 찾는 운동이다. 그것이 진짜 전도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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