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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마드 이야기

   
블루오션의 목회와 각주 없는 목회


<블루오션의 목회와 각주 없는 목회>

“예수께서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 계셨다. 그 때에 무리가 예수께 밀려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 
예수께서 보시니, 배 두 척이 호숫가에 대어 있고, 어부들은 배에서 내려서, 그물을 씻고 있었다. 
예수께서 그 배 가운데 하나인 시몬의 배에 올라서, 그에게 배를 뭍에서 조금 떼어 놓으라고 하신 다음에, 배에 앉으시어 무리를 가르치셨다. 
예수께서 말씀을 그치시고, 시몬에게 말씀하셨다. "깊은 데로 나가, 그물을 내려서, 고기를 잡아라." 
시몬이 대답하였다. "선생님, 우리가 밤새도록 애를 썼으나, 아무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의 말씀을 따라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그런 다음에, 그대로 하니, 많은 고기 떼가 걸려들어서, 그물이 찢어질 지경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다른 배에 있는 동료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자기들을 도와달라고 하였다. 그들이 와서, 고기를 두 배에 가득히 채우니, 배가 가라앉을 지경이 되었다. 
시몬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예수의 무릎 앞에 엎드려서 말하였다. "주님, 나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나는 죄인입니다." 
베드로 및 그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은, 그들이 잡은 고기가 엄청나게 많은 것에 놀랐던 것이다. 
또한 세베대의 아들들로서 시몬의 동료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다. 예수께서 시몬에게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그들은 배를 뭍에 댄 뒤에,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라갔다.” 누가복음 5:1-11

그것은 이전에 없었던 경험이었다. 군목을 마치고 어느 기독교 연구소에 들어간 이후, 나는 매일같이 그런 경험을 했다. 한국 교회의 내로라하는 학자였던 연구소 원장님은 어느 날 내게 논문 한편을 주시고는 읽어보라고 하셨다. 논문을 읽고 교정도 보고, 나중에 평가를 해보라는 것이었다. 존경하는 어른의 논문을 들고 한나절 원고를 읽었다. 

“박사님, 그런데 이게 논문이 맞습니까? 논문이라면 각주가 달려야 하는데  이 논문에는 각주가 하나도 없네요.”
“유 목사, 내 논문에는 각주가 없습니다.”

나는 각주 없는 논문을 처음 보았다. 정말 각주가 없이 논문이 될 수 있는가? 원장님은 자신의 논문은 원자료로 인정받을 만큼의 학자적 자신감을 갖고 계셨다. 다른 사람이 흉내낼 수 없는 정말 독특한 논문이었다. 논문이기보다는 일기장 같은 논문, 때론 수필같은 논문... 사람들은 그래도 그것을 학문적 가치가 있는 논문으로 인정했다. 그만큼의 학자적 능력이 있다는 말일게다. 차별화된 자신만의 학문적 영역을 만들어가는 모습 속에서 신선한 충격을 받게 되었다. 

그 후부터 나는 자꾸만 각주 없는 인생에 대한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각주 없는 인생과 각주 없는 목회에 대한 가능성을 찾아보고 싶었던 것이다. 다른 사람이 살아보지 않은 삶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뿐만아니라 다른 사람이 흉내낼 수 없는 없는 목회에 대한 동경이었다. 힘들고 어려운 삶일지라도 한번 도전하고픈 마음이었다. 

각주 없는 인생은 실패해도 상관이 없다. 처음부터 경쟁관계가 성립되지 않으니 남의 눈치를 볼일도 없다. 그저 각주 없는 인생살이의 고통을 감내하고 즐기려는 마음만 있으면 된다. 각주 없는 인생이기에 아픔이 많겠지만 그것이 곧 즐거움임을 알면 되는 것이다. 

각주 없는 목회도 마찬가지다. 각주 없는 인생을 살려는 자는 인생에 대하여 포용적이어야 한다. 삶을 삶 자체로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개방적 삶의 태도가 아니고서는 각주 없는 인생을 살 수 없겠기 때문이다. 

외국인근로자들을 선교해 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은 평소 내 각주 없는 목회에 대한 소망과 고민을 일거에 해소해 주기에 충분한 제안이었다. 당시에만 해도 외국인근로자들을 선교하는 목회자가 전무한 시대였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세계화 시대에 적합한 선교와 목회 영역이었기 때문이었다. 새로운 시대에 적합한 목회와 선교 그리고 이전에 아무도 해본 적이 없는 새로운 영역이었음이 내겐 매우 매력적으로 느껴진 것이다. 물론 그 매력은 곧 고통이었다. 고통 없는 매력은 없다. 매력적일수록 그만큼의 고통은 늘 공존하게 된다. 정말 매력적인 사역이지만 내겐 죽음만큼 고통스러웠다. 

1994년 봄 어느 날부터 눈이 보이지 않았다. 잠 못 이루는 밤, 그리고 말할 수 없는 분노와 스트레스... 모든 것이 어우러져 내 눈을 갉아먹고 있었다. 어차피 썩어질 육신이지만 너무 일찍 망가져 버린 것이다. 조금만 더 볼 수 있기를 바라지만 이젠 그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 다만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세상을 보는 것 밖에 아무런 소망이 없다. 

어째든 매력적인 제안과 결단 그리고 고통은 오늘 내 삶과 사역의 내용을 결정하게 되었다. 블루오션의 목회는 결국 매력적인 것만큼이나 고통스러운 결단을 요구한다. 먼 바다에 나가 깊은 물에 그물을 내리려면 그만큼의 아픔과 고통을 감수하여야 한다. 그래야 경쟁이 없는 나만의 어장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각주 없는 인생과 각주 없는 목회는 곧 블루오션의 삶과 목회이다. 그것은 경쟁이 없는 대신 경쟁보다 더 큰 시련을 맛볼 각오가 필요하다. 물론 그 시련으로 죽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에게 블루오션의 축복은 없다. 각주 없는 목회는 그렇듯 위험을 각오하는 새로운 영역의 목회를 말한다. 적어도 21세기는 블루오션의 각주 없는 목회를 필요로 한다. 경쟁하는 목회가 아니라 경쟁 없는 절대적 영역을 얻어내고 쓰임받기 원한다면 우리는 먼 바다를 향해 떠나는 결단을 하여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비겁하고 겁이 많다. 용기가 없고 결단력이 부족하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믿음이 없는 것일까? 

바울은 언제나 블루오션의 목회지를 찾았다. 안디옥에서 로마까지 그는 늘 블루오션이었다. 아무도 가지 않은 곳에 찾아가는 기쁨은 아무도 모른다. 새로운 선교지를 찾아가는 즐거움은 고통이지만 행복하다. 고통과 행복은 동전의 앞뒤처럼 이어져있다. 남모르는 기쁨과 즐거움을 느끼려는가? 그렇다면 고통을 선택하면 된다. 죽음까지도 선택할 수 있어야 진짜 남다른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외국인근로자 선교는 그런 매력과 아픔을 동시에 가져다주었다. 

1999년 12월, 당시만 해도 정말 상상할 수 없었던 재한몽골학교를 세웠다. 이주노동자의 자녀와 가족들의 문제를 아무도 인식할 수 없었던 시절이었다. 지금이야 다민족, 다문화, 다인종에 대한 많은 토론과 정책적 대안을 만들려는 노력이 있지만 당시만 해도 그런 이슈는 아무도 상상할 수 없었다. 재한몽골학교도 각주 없는 목회와 블루오션의 목회다. 이제 정식 외국인 학교가 되어 학력인정을 받고, 정상적이고 지속가능한 교육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아무도 흉내낼 수 없는 우리만의 선교 영역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힘들고 어려웠던 시절이었지만 결코 헛된 아픔은 아니었다. 

블루오션의 목회와 각주 없는 목회는 실험적이고 도전적인 용기를 필요로 한다. 고통과 시련도 무서워하지 않는 불굴의 정신이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어차피 한번 살아보는 인생에서 결코 머뭇거릴 이유도 없는 영역이다. 두려워하는 자들에게 결코 블루오션의 흥분은 주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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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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