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텝의 유목민들, 세계 정치 무대에 등장하다.”
(http://english.news.mn )
몽골 인민공화국.
칭기즈 칸에 의해 세워진 위대한 제국이 멸망한 이래, 몽골인 들은 500년 동안 중국의 지배
를 받았고 그 후 70년 동안을 러시아의 통치 하에 있었다. 그러나 위기를 맞은 고르바초프가 개혁을 선택함에 따라 백마의 해인 1990년에 사회주의 정권이 무너지게 되었고 몽골인들 에게도 기회가 찾아왔다. 많은 나라들이 이와 유사한 수순을 밟았으나 대부분의 경우는 더 강대한 나라에 의해 지배를 받게 되는 형식을 취하였다.
이웃의 두 나라를 포함한 많은 국가들이 몽골 또한 이 같은 운명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 예상했다. 세계에서 가장 큰 두 나라들 사이에 위치하며 지리적으로 봉쇄되어있고 3백만에 채 미치지 못하는 인구를 가진 몽골은 여전히 주변국들에게 경제적인 의존을 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안고 있었다.
냉전시기의 국가들은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세력으로 양분화 되어 있었다. 상대적으로 약소한 나라들의 경우 자신들의 경제적 독립에 대해 고려할 권리조차 없었고 강대국들의 선전에 동조하며 이익 또한 그들과 분배하여야만 했다. 그들의 삶은 옷을 입고 있다는 사실 외에는 애완동물의 그것과 일말의 차이가 없었다.
러시아의 지배하에 있었던 70년 동안의 상황도 역시 이와 다르지 않았다. 공산주의자들은 몽골이 러시아의 식민지가 아님을 주장하였지만 실제로는 40,000명의 몽골인 들이 러시아의 압제아래 도륙되었으며 절반이상의 숫자가 러시아인들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당시 몽골이 러시아와 전쟁 중이 아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같은 현실은 실로 ‘러시아인들의 손에 의한 대학살’이라 부를 만 한 일이었다. 더욱이, 역사에 비추어 보아도 비 식민지의 국민들이 이처럼 대거 목숨을 잃었던 전례는 단 한 차례도 없었다.
비록 지금은 그 수가 많이 줄었지만, 여전히 완강한 공산주의 이념 가들은 우리의 조상이자 몽골불교의 지도자인 Bogd Jebtsundamba Khutugtu, 가 매독이나 앓던 난봉꾼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들은 러시아인들이 천연두와 매독으로 점령당한 몽골을 구하기 위해 왔다고 말한다. 오늘날까지도 그들의 선전은 이 같은 정서가 담긴 내용을 반복해 설파하고 있으며 러시아인들이 온 뒤에야 세계 두 번째 공산국가가 된 몽골이 비로소 1990년대까지 다른 나라들과 비슷한 수준까지 발전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지난 대선의 결과는 몽골 국민들이 이 같은 관념을 점차 수긍하지 않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1990년, 세계는 스텝지대의 유목민들이 어떻게 민주화의 길을 선택했는지에 관한 뉴스를 접하게 되었다. 물론 이를 접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소식이 마치 국수를 사랑하게 된 악마의 이야기처럼 들렸을 것이다. 몽골에는 개인 승용차가 없었기 때문이다. 몽골인들 에게 개인 재산이란 소수의 양들 그 이상의 의미가 없었다. 게다가 러시아인들은 고위층부터 평민에 이르기까지 몽골인 들의 모든 행동을 인정하지 않았다.
서구세계에서 이 같은 현상은 모두 몽골에 대한 러시아의 통제와 세뇌로 인해 일어났다. 오직 몽골에서만 한 개인이 공산당의 권한을 자신의 아내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었고, 러시아에서만 아이가 볼셰비키를 자신의 아버지보다 더 사랑하는 일이 당연시 여겨졌다.
과도기의 몽골.
몽골의 첫 민주적 선거가 치러지던 무렵, 미 국무장관인 제임스 베이커가 방문했다는 소식은 세계로 하여금 칭기즈칸의 제국이 여전히 건재함을 알게 하였다. 선거에 의해 선출된 수상 D. Byambasuren이 이끄는 새로운 정부는 역사적인 경제 개혁을 시작하였고 이는 사회주의 국가들 중 최초로 시도되는 일이었다. 고기와 소금 외에는 변변한 상품이 없었던 가게들은 그동안 사람들이 꿈도 꾸지 못했던 제품들과 생산품들로 채워지게 되었다. 모두가 개인사업이나 벤처를 일으키기 시작했고 공무원직에 대한 관심 또한 급격히 하락했다. 사람들은 한 덩어리의 빵 이 아닌 자유를 추구하기 시작했다.
우리의 큰 두 인접 국가들도 이와 비슷한 문제들을 겪고 있었다. 그러나 사회개혁에 대한 그들의 시도는 너무도 큰 대가를 요구하였다. 중국의 천안문 광장은 시위 학생들의 피로 뒤덮였으며 쿠데타가 일어난 지 불과 이틀 후 러시아 공산주의자들이 실각하게 되었다. 그 무렵 아시아에는 몽골 민주연합 외에는 그 누구도 소련 공산세력에 의한 불법적인 권력 장악을 비난할 수 없었다.
몽골은 과도기를 거치며 수없이 많은 역경들과 난관들을 헤쳐 나왔다. 당장에 만연한 공산주의 이념들과 민주주의 진영의 미숙함 그리고 사회적 나태와 무력함 등 많은 문제들을 넘어설 수 있는 즉효 약은 없었다. 그동안 우리가 지불한 희생은 오늘날 우리가 얻은 성과만큼이나 크다. 가난과 빈곤, 범죄, 매춘, 공황, 탐욕 등 은 과도기를 겪으며 피할 수 없이 따라오는 부작용들이다.
세계의 모든 민주주의 국가들 또한 이 같은 문제들을 마주하지 않은 예가 없다. 그러나 선진국들의 경우 문제의 본질을 파악하고 올바른 해결책을 찾음으로써 이 같은 문제들을 비교적 짧은 시일 내에 해결할 수 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근대적 발전에 대한 올바른 방향성이 부재한 정치세력들이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리라 오판한 것이 몽골의 문제였다. 그로인해 22년간의 과도기 중 18년의 세월동안 권력은 과거 공산주의 세력의 손에 맡겨졌다.
진보주의자들은 세계 절반에 이르는 숫자의 인류에게 재앙을 안긴 공산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의 근본적 문제는 자생력의 부재가 아닌 이념의 강압적 전파라고 말한다. 몽골의 첫 번째 민주주의 내각(D. Byambasuren정부) 이 이룩한 경제적 자유는 몽골인민혁명당(MPRP) 정부가 들어선 1992-1996년간 유명무실해졌다. 그 결과 1996년 대선에서는 MPRP정당이 흔적조차 찾기 힘들 정도로 그 세를 잃게 되었다. 민주주의 세력에 의해 국민들에게 부여된 권리가 같은 동료들의 손에 의해 휴지조각이 되어버린 사건이었다.
Baabar의 계산에 의하면 몽골의 민주주의 정당은 2004년이래로 모든 선거에서 승리하였다. 물론 정당에 대해 반감을 갖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대세에 순응하는 일 외에는 도리가 없었다. 이는 민주주의를 반대하는 국민들조차 무의식적으로는 그들의 예측과 계산에 동의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징표였다. 또한 이것은 과도기가 드디어 끝을 맺고 개혁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리는 일이었다.
민주국가 몽골의 약속
몽골 인들에게 독립은 언제나 군사와 무기들을 동반한 일로써 생각되어졌다. 이 같은 믿음은 단순히 어떠한 의식을 갖고 있는 것과는 다르게 몽골 인들의 피와 가슴속에 담겨진 것이다. 불법체류의 신분임에도 불타는 집에서 한국인들을 구해내고 러시아 비행기에 자살테러를 감행하며 총칼로 무장한 미국 가게의 강도를 맨손으로 제압하려 나설 수 있는 것이 바로 몽골인들 인 것이다. 이 같은 정신은 몽골의 젊은이들과 곧 몽골의 미래를 나타낸다. 그들의 행동은 진정으로 끈질기게 독립을 염원하는 몽골인 들의 상징이다.
몽골의 대통령은 최근 성공리에 이슬람 국가인 이란공화국 순방을 마쳤다. 그동안 이란을 비난하기만 했던 국내 언론매체들은 간만에 비약이나 과장 없이 이 소식을 보도했다.
Elbegdorj Tsakhia 대통령은 그가 서로 적대관계인 미국과 이란 양국의 대통령들과 함께 합일점을 도출해낼수 있다는 것을 세계에 나타내 보였다. 오랜 냉전의 결과로 분단된 남, 북한의 상황을 개선시킬 수 있는 몽골의 능력이 세계에 증명된 순간이었다.
G. Dashrentsen 기자는 일전에 몽골인 들은 서로 적대적인 남한과 북한을 화해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며 중국 양안간의 문제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라는 기사를 쓴 적이 있다. 오늘날 대통령의 이란방문으로 인해 그는 민족, 종교, 언어 그리고 지리적 위치를 넘어서서 모두가 협력하고 성공적으로 공존할 수 있음을 세계만방에 알렸다.
옛말에 몽골 인들이 모여 한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누면 무척 가까운 사이임을 알게 되고 몇 시간을 더 보낸 후에는 서로가 혈연관계임을 깨닫게 된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처럼 Elbegdorj 대통령의 이란방문은 상호 진영 간에 문화적 유산과 뿌리에 대한 많은 논의와 교류가 이루어질수록 공통의 관심사가 더 쉽게 드러나게 됨을 증명하는 일이 되었다. 또한 이는 세계만방에 유목민인 몽골인 들이 나라를 세우는 일 또한 충분히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이는 계기가 되었다.
본 기사 수집 및 번역을 위해 건국대학교 황지용 님이 수고해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