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는 노마드 경제다
창세기 41 : 25 - 43
우리나라는 시장이 지배한다고 말하는 대통령이 있었다. 정치가 아니라 경제가 세상을 지배한다는 말이다. 정치권력이 아니라 시장권력이 가장 큰 힘을 갖고 있다는 뜻이다. 여기서 시장은 경제다. 즉 기업을 통해 고용을 창출하고 부를 만드는 사람이 권력을 소유한다는 말이다. 언제부터 그렇게 시장이 정치를 지배하는 절대강자가 되었을까?
사실 그 시장의 지배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매우 역사가 깊은 오래된 사실인 것이다. 성서에 나오는 요셉의 경우가 바로 그 좋은 사례다. 요셉은 젊은 시절 형들의 시기와 질투로 미디안 장사꾼에 애급으로 팔린 노예 출신 총리다. 그는 어린 시절 노예생활부터 철저하게 밑바닥 생활에 익숙해진다. 급기야 애급의 주인이던 보디발의 아내로부터 모함을 받고 감옥에 들어가는 신세가 되었다. 노예에서 죄수로 급강하하는 인생의 여정은 그를 절망하게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요셉은 좌절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이라 받아들였을까? 요셉에게 하루하루의 삶은 마치 외줄 타는 광대의 마음으로 조마조마한 삶의 연속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던 어느 날 감옥에 들어온 바로의 신하들이 있었나보다. 그들은 술 맡은 관원과 떡 굽는 관원이라 한다. 두 사람 다 바로의 비서들이다. 비서는 최측근이다. 최측근 비서는 잘나가면 충신이고 못 나가면 반역자가 된다. 역사가 그것을 말해준다.
떡 굽는 관원은 결국 반역자로 죽임을 당하는 반면 술 맡은 관원은 다시 중용된다. 그 길목에서 그들은 우연히 요셉의 꿈 해몽을 듣게 되고 요셉과 만나게 된다. 그 만남이 요셉의 운명을 가르게 된다.
꿈을 꾸고 꿈을 해석하는 능력이 요셉에게 있었음으로 요셉은 그 만남으로 역사의 한복판에 들어서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 꿈 해석이란 결국 경제문제를 해결하는 지혜다. 그는 탁월한 경제통이었던 것이다.
경제를 알면 미래가 보인다.
어느 날 바로가 꿈을 꾸었다. 매우 흉흉한 꿈이다. 지도자는 언제나 민감하다. 바로가 꾼 꿈은 바로의 마음을 불안하게 한다. 꿈이 예사스럽지 않다는 생각에서다. 꿈을 해몽하는 지혜자를 찾았으나 누구도 그 꿈을 해석하지 못한다. 그때에 술 맡은 관원이 오래전 자신의 꿈을 해몽해 준 요셉이라는 히브리 청년을 기억해 낸다. 그리고 그 후의 이야기는 놀라운 반전을 만들어 낸다. 요셉의 해몽은 바로의 마음에 깊은 인상을 준다. 미래에 대한 문제였으니 더욱 큰 충격이다. 바로의 꿈은 미래에 닥칠 경제문제였다. 결국 먹고 사는 문제는 지도자의 책임이다.지도자가 될 사람에게 경제문제에 대한 분명한 비전은 필수가 되었다.
요셉은 바로에게 7년의 풍년과 또다시 7년의 흉년이 올 것이라 예고하고, 그 흉년의 날을 준비하고 풍년의 날을 함부로 넘기지 말라 가르쳐 주었다. 미래는 노마드 경제를 아는 자만이 생존한다. 요셉은 바로의 꿈을 해몽하면서 미래에 닥칠 재앙의 날에 대하여 경고하고 준비하라고 말해주고 있다. 요셉은 미래를 알았다. 그는 곧 닥칠 미래의 흉년이 얼마나 큰 재난이 될지를 안 것이다. 그 말을 들은 바로는 곧바로 요셉을 애급의 총리로 세운다. 미래에 닥칠 경제적 재난을 대비하고 정책을 만들라 한다. 총리는 바로 다음의 지도자다. 요셉은 가장 중요한 경제 정책을 만들고 집행하는 권력자가 된 것이다. 미래의 지도자는 경제문제에 대한 답을 가진 사람이다.
국민의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할 줄 아는 지도자가 필요하다. 우리나라의 미래도 마찬가지다. 앞으로 권력자가 될 사람은 반드시 미래 경제를 알고 대비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요셉은 미래의 먹고 사는 문제를 알았다. 그렇기에 그는 애급의 총리가 된 것이다. 이주민 나그네가 총리가 된 경우는 특별하지만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준다. 노마드 경제의 원조는 요셉이다.물론 야곱도 있지만 경제 문제를 거국적으로 해결해 가는 지도자라는 측면에서 교회와 미래의 지도자들이 배워야 할 사람이 요셉이다.
하나님이 주신 경제적 통찰력을 소유하라
노마드 경제학의 원조는 요셉이다. 지도자가 될 사람은 국민의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지도자의 길은 멀고 험한 것이다. 지도자가 경제 문제를 모르면 외환위기와 같은 심각한 국가적 재난을 불러온다. 정치란 경제다. 정치는 국민을 먹고 살 수 있도록 이끌어가는 힘이다. 그렇다고 경제인이 정치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정의에 기초한 정치철학이 있어야 온전한 통치가 이루어진다. 다시 말하면 경제나 기업의 목적은 이윤추구다. 정치는 정의를 기초로 한다. 경제정의라는 것은 정의에 기초한 정치철학에서부터 나온다.경제정의는 어느 한 기업이나 개인의 독점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다. 모두를 위한 경제가 되어야 함이다.
모두에게 동등한 기회가 주어져야 하고 경제적 부를 가장 밑바닥까지 흘러가게 하는 힘은 경제정의에 대한 철학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인간은 원초적으로 욕망한다. 탐욕하는 인간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의로운 분배와 경제적 나눔이라는 것은 철학에 근거하지 않으면 가능하지 않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것이 바로 철학이다. 생각하고 고민하는 인간만이 경제적 나눔과 정의를 실천할 수 있다.
권력을 잡으려는 자들은 적어도 경제적 가치의 실현을 이루어낼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권력자에게는 경제에 대한 통찰력이 있어야 한다. 경제문제에 대한 철학이 없다면 국민은 불행해진다. 우리역사가 그것을 증명한다.
요셉 같은 지도자가 필요하다. 미래의 먹고사는 문제는 지도자의 통찰력에서 결정된다. 물론 좋은 참모도 필요하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지도자란 국민을 먹이는 부모의 자리다.
요셉을 본받아야 한다. 경제적 어려움을 알고 미래를 준비하는 요셉의 모습이 그리운 까닭이다.
미래의 경제는 무엇일까?
엄청난 변화의 속도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미래에 대한 예측은 대단히 중요하다. 조금만 늦어도 미래는 과거가 되고, 사소한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 세상에서 살고 있음으로 우리에게 미래에 대한 안목은 생존의 문제를 결정한다. 미래 산업에 대한 다양한 예측이 있다. 그러나 미래에 주목하여야 할 산업은 다음의 다섯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미래학자나 경제전문가들이 주목하는 산업은 헬스케어, 환경, 자동차, 금융 그리고 서비스 산업 등이다.
헬스케어 산업은 노령화 시대와 더불어 발전할 가능성이 높다. 줄기세포나 나노기술의 발전 등으로 건강과 질병의 문제는 상당히 발전할 것이다. 건강에 대한 관심은 경제가 발전하면서 더욱 높아질 것이다. 인간의 욕구 중 가장 큰 욕구는 질병 없는 장수다.
환경산업은 미래 산업의 핵심이다. 우리나라도 미세먼지로 인한 심각한 환경문제를 겪고 있지 않은가! 원자력발전소를 대체하는 신재생에너지 산업은 큰 각광을 받는 산업이다. 그러므로 환경문제는 영원한 미래 산업이 될 것이다.
자동차는 전기자동차와 로봇까지다. 자동차는 움직이는 인공지능과 로봇의 융합이다. 전기자동차와 무인자동차로의 진화는 필수다. 테슬라 모터스와 구글의 전기자동차와 무인자동차 기술은 상당한 수준에 와있다. 애플과 삼성도 그 방향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자동차 산업의 진화는 인공지능과 로봇, 그리고 신재생 에너지의 핵심을 융합하는 산업이다.
금융은 이미 검증된 산업이다. 금융 산업의 미래는 아무도 모른다. 어디로 어떻게 진화할지 모르는 세상이다.
그 외에도 서비스 산업이 있다. 수많은 서비스 산업이 생겨날 것이다. 누가 새로운 서비스를 창조하는가가 문제다.
중요한 것은 미래에 어떤 산업이 유망한지가 아니다. 이외에 과거의 아날로그 산업도 여전히 유효하다. 오히려 인간의 마음은 과거로 회귀하려는 측면이 있다. 모두가 인공지능과 사물 인터넷 같은 4차 산업혁명에만 주목하지 않는다. 오히려 정반대의 고전으로 돌아가자는 움직임도 일어나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는 통일이후가 문제다. 통일이후의 미래 산업을 붙잡아야 성공할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통일이라는 지상과제가 주어져 있다. 다른 나라와는 상황이 다른 것이다. 모든 나라가 가려는 방향에서도 우리만의 질서와 원칙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통일은 필수다. 통일의 날은 올 것이 확실하다. 그날에 필요한 경제구조가 있다. 산업도 그렇다. 어떤 기업이어야 하는가? 요셉의 지혜와 비전이 필요한 이유다.
요셉 같은 새로운 지도자가 나와야 한다. 통일이후의 한반도와 우리민족의 미래를 끌고 갈 수 있는 요셉 같은 사람이 필요하다. 통일이후의 경제구조와 산업은 어떤 것일까?
나섬이 자립하여야 할 이유
나는 나섬과 몽골학교의 미래를 예견하며 목회를 한다. 선교도 마찬가지다. 미래의 경제와 자생력을 생각하며 목회를 한다.
요즘 들어 재미있는 하나의 사례가 있다. 전기 누진제와 나섬의 여름나기에 대한 것이다. 듣기에 따라서는 자랑인 것 같아 미안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지금 누구보다 호사를 누리기에 하는 말이다. 전기 누진제로 고통 받는 세상에서 한 여름의 무더위를 모르며 사역하는 나섬의 이야기를 들어보라. 우리는 지금 에어컨을 하루 종일 가동하면서도 누진제와 같은 전력문제로부터 빗겨 살아간다.
왜냐하면 옥상에 만든 햇빛 발전소 때문이다. 하루에 생산되는 전기량으로 얼마든지 냉방기를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준비란 이런 거다.
자립하고 자생하지 못하면 선교도 가정도 지속가능할 수 없다. 지속가능하지 못한 사역과 인생은 한시적이다. 나섬은 한시적인 공동체로 끝날 수 없다. 주님 오실 때까지 나섬의 사역은 계속되어져야한다. 그렇다면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 옳다. 나섬이 요셉의 노마드 경제에 관심을 갖는 이유가 그것이다. 요셉처럼 생각하고 살아야 한다. 그것이 오늘 우리가 가야하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