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7 : 7
우리가 실패하는 이유는? 포기하기 때문
만약 스티브 잡스가 애플에서 쫓겨나 절망하고 좌절하여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면 과연 오늘의 애플은 존재할 수 있었으며 스티브 잡스는 신화 같은 삶을 살 수 있었을까? 과연 오늘의 삼성이나 현대 같은 대기업은 단 한 번의 실패도 없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을까? 아니다. 수없이 무너지고 실패하고 맞이한 성공의 열매일 뿐이다. 한마디로 실패는 있어도 포기는 없다는 신념으로 일군 성공이 오늘의 그들이다. 역사 속에서 우리는 이와 같은 사례를 수없이 찾아낼 수 있다. 우리의 일상도 마찬가지다. 개인의 삶속에서도 성공과 실패의 원인을 분석해 보면 결국 끝까지 인내하고 포기하지 않으며 다시 일어나 도전한 사람만이 성공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다. 성서에서 실패한 사람의 이야기는 무수하다.
그중 대표적인 사람이 야곱이다. 야곱은 얼마나 많은 실패를 하였는가? 먼저는 아버지와 형을 속임으로 실패를 한다. 아버지와 형을 속여서 성공할 수 있었다면 야곱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은 야곱의 얕은 속임수를 용납하지 않으셨다. 그의 노력은 실패로 돌아갔다. 결국 쫓겨나는 신세로 전락했던 것이다. 그가 찾아간 곳은 외삼촌 라반의 집이다. 라반에게는 두 딸이 있었으니 레아와 라헬이다. 야곱의 마음은 라헬에게로 쏠려있었던 모양이다. 결국 라반의 허락이 있었음으로 야곱은 결혼을 한다. 그리고 첫날밤을 보낸 야곱의 신부는 그가 사랑한 여인 라헬이 아니라 언니 레아가 아니던가?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며 라반에게 따지듯 물었으나 결국 돌아온 것은 7년의 종살이를 더하면 라헬을 주겠다는 약속이다. 또 한 번의 실패다. 그러나 야곱은 포기하지 않고 긴 세월을 라반의 집에서 목동으로 종살이를 한다. 사랑을 얻기 위해서라면 7년이 아니라 70년이라도 하겠다는 일념이다.
그렇게 얻은 라헬에게서 요셉과 베냐민이 태어났으니 만약 야곱이 라헬을 얻기 위하여 기다리지 못하고 포기하였다면 구원의 역사는 이루어질 수 없었다. 그 다음의 이야기는 야곱이 그렇게 일을 해도 라반이 야곱에게 임금을 제대로 주지 않았음으로 야곱은 라반과 마지막 협상을 하는 장면이다. 야곱은 자신이 키우는 가축들 가운데 얼룩무늬 점이 박힌 것이 태어나면 자기 것으로 하고, 그렇지 않은 것은 라반의 것으로 하자는 제안으로 마지막 겨루기를 한다. 불가능한 협상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던 마지막 제안이 기적같이 야곱에게로 기울어지면서 결국 야곱은 성공의 신화를 만든 장본인이 되었다. 성공의 상징이 야곱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수없는 실패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도전하는 인내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믿음은 인내다.
모세를 보라! 모세는 미디안 광야의 족장 이드로의 사위가 되어 나이 80살 된 별볼일없는 목자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에게로 데리고 나오는 사명이다. 그때에 모세의 반응은 대단히 유약하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존재라며 자신은 그 일을 할 수 없다고 버티는 장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시며 일어나 바로에게로 가라 하셨다. 포기하는 모세와 포기하지 말라고 격려하고 세워주시는 하나님의 대화가 인상적이다.
모세가 죽은 후 가데스바네아의 12명의 정탐꾼 중 끝까지 살아남아 가나안에 들어간 갈렙의 이야기 또한 우리에게 도전을 준다. 갈렙은 여호수아에게 말한다. 자신이 모세와 맺은 약속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 헤브론의 산지를 달라고 요청한다. 그때의 갈렙은 이미 85세가 넘은 노인이었다. 갈렙은 노인이라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그것이 갈렙이 위대한 이유다.
포기하면 실패하는 것이다. 실패해서 얻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중간에 멈추었음으로 우리는 실패자가 되는 것이다. 끝까지 포기하지 말자.
호피 인디안의 기우제처럼
호피 인디안들이 기우제를 드리면 반드시 비가 온다고 한다. 그들은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드리기 때문이다. 우물을 파는 어떤 사람이 우물을 파면 100% 물이 나온다는 전설을 갖고 있다. 어떻게 우물을 파기에 그런 신화가 만들어졌을까? 그는 물 나올 때까지 우물을 파기 때문이라 한다. 이 두 이야기의 주제는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해 보라는 것이다. 간절하게 소망하고 바라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인생은 그 지점에서 승패가 갈라진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장이다. 히브리서의 믿음장에 나오는 인물들은 한결같이 믿음으로 살아 승리한 사람들이다. 그들의 공통점은 믿음이 현실이 되기까지 끝까지 포기없는 삶을 살아낸 사람들이었다.
노아 같은 이는 배를 만들며 홍수를 대비할 때에 얼마나 놀림을 받았을까? 그는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에 대하여 상상하며 인생을 살았다. 결국 홍수의 재앙이 닥쳐왔을 때에 모두가 노아의 인내와 믿음을 깨닫게 되었으리라.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고 준비된 자만이 방주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우리의 믿음이 현실이 되고 오늘 내가 살아가는 길에 대하여 모두가 인정할 때가 올 것임을 믿고 갈 길을 가야 한다. 여기서 믿음이란 자기 정체성과 존재감에 대하여 자의식을 갖는 것이다. ‘나는 나’라는 자기 존재에 대한 확실한 자존감을 갖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포기하는 이유는 타인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하기 때문이다. 주변의 사람들을 무시할 것은 아니지만 주변의 시선이나 평가에 지나치게 의존할 것도 없다. 그들은 그들의 삶을 살고 나는 나답게 살아가면 된다. 왜 내가 아니라 남의 삶을 대신 살아주려 하는가?
내가 누구인가에 대한 자의식을 소유하는 것이 우선이다. 믿음은 하나님과 나의 관계를 중요하게 본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공생애의 삶을 산다. 그것을 예수의 메시아적 자의식의 발견이라 부른다. 우리도 그렇다.
실패는 해도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는 삶은 하나님과 내가 맺은 약속과 나에 대한 하늘의 사명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되면서 시작되는 신앙적 삶의 소중한 형태다. 약속이 이루어질 때까지 포기하지 말자. 그래야 승리할 수 있다.
나는 실패해도 포기하지 않는다
지금 나는 눈이 보이지 않는 장애인이 되었다. 슬프고 아프고 괴롭고 무진장 고통스러운 상황이다. 그러면 나는 죽어야할까? 아니다. 이제는 그렇게 죽지 않을 것이다. 고통이 나를 죽이지 못하는 이유는 내 삶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하나님의 나에 대한 계획과 주어진 사명이 엄청나게 클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 순간부터 나의 삶은 여전히 진행형이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과거 언젠가는 죽고 싶어 죽게 해달라고 기도를 했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죽는 날은 죽는 날일뿐 오늘은 나의 갈 길을 가게 해달라고 기도를 한다. 갈 길을 가다가 죽는 날이 오면 그날이 내가 은퇴하는 날이고 내가 이 세상을 떠나는 날일게다.
암에 걸려 병원에 들어가 환자가 된다할지라도 암과 함께 자기의 길을 가면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위인이 된다. 예전 몽골의 연세친선병원 원장이던 박돈상 장로님은 간암 4기의 몸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삶을 살다가셨다. 그분은 언제나 이렇게 말씀하셨다. '암아, 너는 내안에서 살아라. 나는 내 삶을 살 거다'라고 말이다. 무척 기억에 남는 고백이다.
박장로님은 어느 날 암이 아니라 다른 이유로 세상을 떠나셨다. 그분은 암에 걸렸어도 병원에 들어가 죽는 날을 기다리신 것이 아니라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몽골 선교의 현장에서 치열하게 암환자가 아닌 선교사의 삶을 살다가셨다. 자신에게 주어진 약속의 삶을 살아내신 분이다. 그래서 나는 박장로님을 기억하고 추모한다. 정말 박돈상 장로님은 위대한 거인이시다.
나는 누구인가? 나섬은 왜 여기 있어야 하는가? 매일 묻고 또 묻는다. 나는 길을 가는 나그네이고 순례자일 뿐이다. 혹시 잠시 쉬어 갈 수는 있어도 한 곳에 머물러 죽음을 기다리는 어리석은 인생을 살지는 않겠다고 다짐한다. 그래서 나섬과 나는 오늘도 길을 걷는다. 조금씩 앞으로 나아간다. 길이 없으면 길을 개척하고 어디로 갈지 모르면 하늘에 묻는다.
중요한 것은 포기하지 않는 것이리라. 가자! 죽는 날을 두려워말고 길을 가자. 가장 두려운 것은 한 곳에 머물러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성안에 갇히면 그날이 죽는 날이다. 갈 길을 가고 있다면 아직 우리는 살아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