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장로님은 한마디로 영적인 칭기즈칸이며 인간적인 칭기즈칸이다. 왜 칭기즈칸과 김장로님을 비교하는가 묻는다면 그것은 김장로님을 몽골과 따로 떼어내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김장로님과 나섬이 처음만난 것은 2001년 나섬공동체 안에 몽골문화원을 만들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당시 필자는 다문화 선교공동체인 나섬공동체를 만들어 운영하고 있었다. 1992년부터 시작하여 이미 구로공단에서 시력에 심각한 문제가 생겨 고통 가운데 있을 때다. 그러다 1999년부터 재한몽골학교를 만들어 학교를 운영하기 시작했고, 몽골 정부로부터 몽골문화원 설립에 대한 양해 각서를 받아 문화원을 세우게 되었다. 서울시와 울란바타르시(몽골의 수도)가 협력하여 세워진 몽골문화원은 외교통상부 산하의 사단법인체다.
그 몽골문화원의 초대 이사장으로 김건철 장로님이 참여하게 되시면서 장로님은 몽골과 깊은 관계를 맺게 된 것이다. 당시에 몽골과 한국을 이어주는 민간외교 단체가 거의 전무한 시기였기에 몽골문화원은 거의 유일한 대몽 민간단체의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뿐만아니라 몽골학교가 함께 있었으므로 자연스럽게 몽골문화원은 몽골학교와 함께 몽골 정부로부터 인정받는 법인체였던 것이다.
몽골문화원의 이사장으로서 김장로님은 매년 몽골의 수도 울란바타르를 방문하셨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일은 어느 해인가 당시 몽골의 총리였던 엥흐볼트 총리가 우리 일행을 대통령 궁의 영빈관으로 초청하여 만찬을 배설한 것이다. 김장로님을 비롯하여 우리 일행은 영빈관에서 총리와 장관 등이 참여하는 만찬에 초대 받아 융숭한 대접을 받았었다. 그 후 매년 울란바타르를 방문할 때면 울란바타르 시장은 물론이고 몽골의 중요한 지도자들과 많은 교제를 나눈 기억이 난다. 장로님은 민간외교의 한복판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셨다. 그 역할에 대한 감사로 몽골 국립교육대학으로부터 명예교육박사학위를 받았으며, 2007년에는 몽골의 엥흐바야르 대통령이 방한하여 롯데호텔에서 몽골 정부가 수여하는 훈장 중 가장 큰 훈장을 장로님께 달아드렸다. 당시 나는 몽골학교 이사장의 신분으로 장로님과 함께 대통령으로부터 친선훈장을 받았었다.
장로님이 몽골과 얼마나 깊은 관계를 맺었는가는 이 지면을 다 할애해도 서술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일이 있었음으로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다. 다만 장로님이 보여주고 나누어주신 그 삶에 대한 것은 분명히 기록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솔직히 장로님이 계셨음으로 오늘날의 몽골학교와 몽골문화원이 존재할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 이것은 진정 김장로님의 삶과 나눔의 흔적임을 증언하고 싶다.
거의 십여 년 동안 몽골문화원의 이사장으로 계시면서 장로님은 곳곳에 사랑의 실천을 행하셨으며 몽골에 대하여 무한한 애정을 나누어 주셨다.
내가 칭기즈칸과 장로님을 비교하는 것은 이 부분에서다. 칭기즈칸의 삶은 포용과 관계가 깊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 중 한 사람으로 기록되는 사람이 몽골의 칭기즈칸이다. 그는 가난하고 힘없는 작은 부족의 칸이었다. 몽골이라는 당시 초원의 부족은 다른 부족과 비교해 그 존재감이 미미하였던 것이다.
칭기즈칸이 어렸을 적 이미 아버지 예수게이는 다른 부족에 의하여 독살되었으므로 그는 형제들과 들쥐를 잡아먹으며 생존하여야했다. 그런 칭기즈칸이 어떻게 몽골 초원의 위대한 칸이 되었을까? 그리고 역사상 가장 크고 위대한 제국을 만들었을까? 왜 전세계는 칭기즈칸을 가장 위대한 인물 중 한명으로 선정하였을까?
그 이유는 칭기즈칸의 포용력 때문이다. 칭기즈칸은 어떤 사람도 함부로 취급하지 않았다. 그를 존중하고 따르고자하는 사람들에게 칭기즈칸은 상상할 수 없는 포용력으로 끌어안았다. '위대한 몽골의 사람들'(예케 몽골 우루스)라는 말을 만들어 모든 초원의 부족을 몽골이라는 작은 부족의 이름하에 통합한 칭기즈칸은 민족과 종교와 사상과 이념을 초월하여 인간을 포용한다. 그것이 몽골의 칭기즈칸이다.
바로 김장로님에게서 칭기즈칸의 위대한 포용력이 느껴진다. 나는 김장로님에게서 단 한 번도 다른 이들을 비판하거나 폄하하시는 말씀을 들어본 적이 없다. 설사 장로님에게 부면하게 대하는 사람들에게도 따뜻하고 넓은 바다 같은 마음으로 안아주시는 모습 속에서 언제나 감동을 받았다.
작은 체구의 장로님에게서 나는 칭기즈칸의 큰 모습을 보았다. 그래서 나는 장로님을 작은 거인 칭기즈칸이라 부르고 싶다. 역사상 가장 짧은 시간에 가장 넓은 땅을 차지한 제국의 주인으로 살았던 칭기즈칸의 위대함이 장로님 안에 있다. 이것은 결코 과장이나 아부가 아니다. 나는 인정하고 증언할 수 있다. 그만큼 장로님의 삶은 크다. 특히 몽골학교를 세울 때에 장로님의 도움이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의 몽골학교를 만들 수 없었다. 어느 날 장로님은 전화로 '학교는 어떻게 잘 되어갑니까?' 이 말씀 한마디로 나는 장로님의 마음을 읽는다. 그만큼 몽골 아이들을 사랑하신 장로님이다. 하지만 장로님의 건강이 좋지 않으시다하니 걱정이 된다.
아무나 장로님을 흉내 낼 수 없을 만큼 그 분은 거인이시다. 오래 사셔야 한다. 정말 오래오래 하나님이 주신 수를 다하시길 기도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장로님의 건강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뿐임을 알기 때문이다.
칭기즈칸처럼 모든 이들에게 마음을 열고 대하셨던 거인 김건철 장로님에 대한 기억은 너무도 많다. 함께 고비사막을 달렸던 기억, 저 깊은 몽골의 홉스골 호수를 갔던 그 아름답고 행복했던 순간들, 그 홉스골 호수에서 먹었던 민물 매운탕, 아마 다른 이들은 상상할 수 없었던 그 홉스굴 민물 매운탕의 맛. 그리고 함께 말을 타고 초원을 달리던 김장로님의 모습이 그립다. 지금은 문화원과 몽골 학교에서 한발 물러나셨지만 장로님의 우리 공동체에 대한 애정은 분명 변함이 없을게다.
우리는 장로님을 더 분명하게 기억하며 살아야 한다. 장로님이 얼마나 몽골을 사랑하셨는가를 기억하여야 한다. 적어도 필자와 나섬, 그리고 몽골학교와 문화원은 장로님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이것은 의무이며 책임이다. 나는 지금도 많은 이들에게 장로님에 대하여 증언한다. 몽골과 가장 중요하고 깊은 관계를 맺게 하신 분이 누구냐 묻는다면 잠시도 머뭇거리지 않고 김건철 장로님이심을 말한다. 조만간 장로님을 뵙고 싶다. 어린아이처럼 해맑게 웃으시는 그 거인의 웃음소리가 그립다.
(*김건철 장로 88세 회고록 게재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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