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지 못하는 선교사, 집착하는 목사
우리 공동체의 새해 표어는 '세계로 나아가라!'이다. 바울이 드로아에서 마케도니아 사람의 환상을 보고 아시아를 넘어 유럽으로 바다를 건넜다는 사도행전 16장의 말씀을 새롭게 깨닫게 되어 표어로 정한 것이다. 나는 그동안 노마드 유목민 목회를 하면서 우리나라 안의 이주민들에게 관심을 갖고 목회를 해 왔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나 자신도 이주민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외면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에게 묻게 되었다.
우리에게 찾아온 이주민들을 목회의 대상으로 볼 뿐만 아니라 나 자신이 이주민의 노마드적 삶을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이제는 내가 먼저 세계로 나가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이주민들은 들어오고 우리는 또한 유목민이 되어 나가야 한다. 오고 가는 길목에서 역사는 새롭게 만들어 진다. 바울이 드로아에서 마케도니아 사람의 환상을 보고 바다를 건너지 않았다면 복음은 우리에게 들어오지 못했을 것이다. 아마도 기독교 자체가 세계종교로 자리매김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역사는 한 인간의 결단과 순종으로 엄청난 변화를 맞이했다. 바울이 그 순간 결단하고 바다를 건널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언제나 유목민처럼 떠날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는 선교지 어느 곳이든 머물러 있기를 원하지 않았다. 가지 말라는 예루살렘을 향해서도 그는 어김없이 자신의 원칙을 고수했다. 그 결과 그는 죄인의 신분으로 로마에까지 끌려가게 된다. 그는 자신이 선교사이면서 동시에 선교적 삶을 살았던 사람이다. 그래서 바울사도가 위대한 것일 게다.
선교사가 선교적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선교사가 떠나지 못한다면 그는 선교사가 아니다. 선교사는 떠남을 살아가는 사람이어야 한다. 떠나지 못하는 선교사는 선교사가 아니다. 목회도 마찬가지다. 집착하는 목회는 목회가 아니라 그냥 직업이다.
이제는 나자신의 이야기를 해야 한다. 나부터 먼저 떠날 준비를 하고 살아야 한다. 떠남은 노마드 목회의 대 전제이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의 문제는 목회자의 집착에서부터 시작되는 것 같다. 집착이란 내려놓지 못한 채 붙잡고 살아가려는 인간적 본능의 한 형태다. 내려놓는다는 말을 가장 많이 하는 곳이 교회이면서도 우리는 내려놓는 일에 순종하지 않는다. 떠나는 것이 복음의 중요한 가치임에도 우리는 떠남을 실천하지 못한다. 집착이 원인이다. 집착하니 교회에서 떠나지 않으려고 막가파처럼 갈등하고 싸운다. 나가라는 사람과 못나간다는 사람간의 다툼은 얼마나 가련해 보이는가. 그렇게라도 목회를 하여야 하는가 물으면 그들은 한결같이 목구멍이 포도청이기 때문이라 답한다. 먹고 사는 문제를 생각하니 못나간다고 버틴다. 어느새 우리는 교회에서 먹고사는 일에 길들여져 간다. 예수께서, 바울사도가 그렇게 길들여져 살았는가? 차라리 길거리에 좌판이라도 펴고 살겠다는 각오로 나오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한다.
자신이 개척한 교회이므로 남에게 물려주는 것을 아까워하는 이들도 있다. 어쩌면 나에게도 그런 정도의 목회지가 있다면 분명 고민했을 문제다. 자식에게 물려주는 세습의 딱지를 불명예스럽게 받는다 해도 끝까지 그 길을 포기하지 않는 것 또한 집착 때문이리라.
떠나지 못하는 선교사와 집착하는 목사는 정작 나 자신일지도 모른다. 며칠째 가슴이 답답하고 마음이 무겁다. 언제까지 이렇게 머물러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좀 더 당당하게 목회하고 선교하는 삶을 살고 싶다. 큰 교회들에게서 들려오는 소식은 한결같이 집착이 문제다. 떠나지 못하는 것이다. 버리지 못하고 내려놓지 못하는 그 집착이다. 몇 년 전 돌아가신 법정 스님은 무소유를 평생 실천하며 살았다 한다. 한분의 스님이 보여준 그 삶이 얼마나 큰 가르침으로 남아 우리를 깨닫게 하며 감동을 주는가? 큰스님의 그 무소유의 삶이 종교를 초월해 우리 기독교의 지도자들을 부끄럽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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