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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해근목사와 함께하는 선교여행/터키편(4)


에베소와 네스토리우스 그리고 교회의 역사


초대교회에서 종교회의란 교리를 만들고 추인하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사도행전 15장 예루살렘 종교회의를 필두로 초대교회에서는 여러 번의 종교회의가 열린다. 그중 대표적인 종교회의가 니케아 종교회의, 칼케돈 종교회의, 소피아성당에서 열린 콘스탄티노플 종교회의 그리고 에베소 종교회의다. 물론 로마에서도 종교회의가 열렸으며 그 외에도 다수의 크고 작은 종교회의가 있었지만 지금의 터키에서 열린 종교회의가 가장 중요한 회의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러니 터키와 초대교회 종교회의는 불가분리의 관계를 갖는다. 이스탄불 그러니까 과거의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칼케돈, 니케아 등의 중요한 종교회의가 있었다. 그런 종교회의 중 내 관심을 끄는 것은 바로 에베소 종교회의다. 
지금의 터키 에게해 연안의 도시 에베소는 알렉산더대왕이후 금융과 상업의 중심지로서 화려하고 부유한 대도시였다. 이탈리아나 그리스에서 뱃길로 왕래가 쉬울 뿐아니라 아름답고 살기 좋은 에베소는 당시 철학과 문학 역사 등 학문의 중심지였으며 예술가와 상인들이 몰려와 한때는 인구 25만 명을 가진 대도시로 발전했다. 지금도 대소공연장, 도서관, 의회, 신전, 유곽, 운동장, 체육관, 목욕탕, 시장터를 비롯하여 해안가 항구까지 뻗은 대리석 도로, 상하수도 시설 등 그 유적을 통하여 세심한 도시계획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특히 이곳의 아르테미스신전은 많은 사람들이 숭배하던 곳으로 AD53년 바울이 이곳에서 전도하다가 큰 봉변을 당할 뻔 했던 곳이기도 하다(행19장)
사실 에베소 종교회의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에베소 종교회의와 그곳에서 이루어진 일단의 이단정죄 그리고 이단으로 정죄된 네스토리우스를 비롯한 네스토리안들의 동쪽으로의 이동 등이 교회의 역사와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나는 에베소를 매우 중요한 곳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 후 네스토리우스를 따르는 네스토리안들은 그들의 신조를 지키기 위하여 지금의 시리아와 이라크를 넘어 동쪽으로 흘러간다. 결국 그들이 도착한 곳이 당나라의 수도 장안이었다. 그곳에는 경교비라는 네스토리안들의 흔적이 남아 있고 그 네스토리안들의 신앙이 바로 경교라는 이름으로 당나라와 우리나라의 신라에까지 전래된다. 지금 경주에는 그 때의 전래 흔적이 남아 있다.
그 후 당나라를 지나 송나라와 원나라에도 여전히 네스토리안들은 존재한다. 특히 칭기즈칸의 제국인 원나라 수도에는 네스토리안들의 예배 처소가 있었다. 실제로 지금의 몽골 하라오름에는 그 당시의 교회 터가 있다. 칭기즈칸은 모든 종교에 대하여 개방적이었다. 그는 자신의 후계자들에게 유언을 하며 결코 종교 문제에는 개입하지 말 것을 명령한다. 종교란 사람의 힘으로 제압하거나 제거할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었을까. 칭기즈칸의 종교정책은 오늘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준다.

만약 그 네스토리안들의 기독교가 오늘까지 남아 있게 되었다면 기독교 역사가 어떻게 되었을까를 생각해본다. 칭기즈칸의 막내 며느리가 바로 그 네스토리안의 기독교를 믿었으며, 지금의 내몽골 지역에는 그 당시의 기독교인들의 공동묘지가 발견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으니 당시에 네스토리안들이 얼마나 중국을 중심으로 아시아 전역에 광대하게 분포되었는지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네스토리안 기독교는 원나라 시대를 정점으로 시들어 간다. 그것은 일종의 혼합주의의 영향 때문이다. 당시 원나라 제국에는 전세계의 모든 종교가 모여들고 있었고 제국의 칸은 국가적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모든 종교의 지도자들을 초청해 원탁회의를 했다고 한다. 네스토리안 기독교는 물론이고 도교와 이슬람, 불교와 유교에 이르기까지 전세계 모든 종교 지도자를 한 자리에 모았다고 한다. 그런 종교회를 통하여 통치자들은 민중의 삶과 근접해 가려는 노력이 있었음을 볼 수 있다. 원나라의 지도자들은 종교를 통치의 수단으로 이용한다. 그러므로 모든 종교는 어느 하나라도 배척하거나 무시할 수 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상황에서 네스토리안 기독교는 몰락을 하게 된다. 그것은 마치 바람 없이는 배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듯이 박해와 고난을 통하여 성장한다는 기독교 역사의 관점에서 볼 때 당연한 것일 게다. 
AD 313년 콘스탄티누스의 밀라노 칙령은 기독교 역사를 바꾼 대 사건이다. 기독교를 인정한 이 칙령으로 지하의 카타콤베에서 예배를 드리던 성도들은 지상으로 올라 올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지하에서 지상으로 예배의 처소만 바뀐 것이 아니다. 박해와 순교의 고난도 감수하며 예배를 드리던 그들에게 지상의 예배는 평안함 그 자체였다. 뿐만아니라 종교적 권력이 매우 중요하게 인식되기 시작하였다. 교회의 지도자들은 종교권력의 맛에 힘없이 빠져들어 간다. 권력이란 얼마나 좋은 것인가? 누군가를 지배하고 싶다는 것은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이다. 그 원초적 욕망이 권력을 만들고 인간은 권력을 잡기 위하여 존재하게 된다.

자연스럽게 교회와 지도자들은 타락한다. 지하에서 예배를 드리던 성도들은 지상으로 올라온 순간부터 기독교의 본질을 잃어버린다. 세속권력과 타협하면서 그들은 기독교의 본질적 삶과는 다른 종교인으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기독교에서 박해와 순교는 마치 민주주의가 피를 먹고 자라는 것과 같다.

네스토리안 기독교는 원나라라는 강력한 제국의 보호 속에서 살게 되면서 그들이 가져야 했던 기독교의 본질을 상실하기 시작한다. 그것이 혼합주의다. 다른 종교와 적절한 관계를 유지하고 정치적 보호막 안에서 그들의 선교는 치열할 이유가 없었다. 열정과 의지를 잃어버린 기독교는 더 이상 기독교로 존재할 수 없다. 네스토리안 기독교는 그렇게 사라진다. 
기독교가 권력화되고 정치적 이념의 보호막 혹은 그 이념의 도구로 전락하는 순간 교회의 정체성은 무너진다.
이것이 역사다. 그리고 그 기독교의 역사는 오늘 한국교회의 모습이다. 우리는 교회성장과 안정을 위하여 정치적 이념적 타협을 마다하지 않았고 박해와 고난을 거부했다. 저항하지 못하는 교회는 더 이상 교회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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