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은 우리처럼 살지 않았다
터키에서 바울을 생각했다. 사도행전을 읽으며 바울 서신을 묵상했다. 누구인들 편안하게 한곳에 머무르고 싶지 않겠는가마는 실상 바울은 언제나 떠나기에 급급했다. 1차 선교 여행에서부터 로마의 순교하는 자리에 이르기까지 그는 언제나 흘러가는 물처럼 때론 천천히 그러나 너무 느리지 않게 또 다른 곳으로 떠나는 유목민이었다. 에베소 두란노에서 잠시 2년여의 짧은 목회를 하였지만 그것도 더 이상 그에게 허락되지 않는 호사였는지 모른다. 고린도교회에서 몇 개월, 빌립보에서 얼마간의 여유를 누렸을 뿐 그 외의 곳에서는 언제나 핍박과 고난으로 도망하기에도 바쁜 삶을 살았다.
가지 않아도 되는 예루살렘으로의 마지막 여정은 눈물겹도록 안타깝다. 스스로 죄인이 되려했던 바울의 선택은 바보 바울이라는 별명을 붙여주고 싶을 만큼 가슴 아프다. 로마에서 감옥에 갇혀 살아야 했던 2년여의 수난은 죽음을 결단하지 않으면 갈 수 없는 길이었다. 누가 그 길을 가라 시켰는가? 누가 바울에게 죽으라 강요한 적이 있었는가? 왜 바울은 한 곳에서 머물지 않고 언제나 떠도는 나그네 같은 유목민으로 살았을까?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한곳에 머물며 산다. 가라고 밀어내도 가지 않겠다고 아등바등하는 그 가벼움과 비겁함이 너무 싫다. 목사가 되어 살면서도 필자 또한 떠나지 못하는 믿음 없음을 깨닫는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노라 고백했으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세속적이다. 얼마의 월급으로 얼마의 영광을 누리고 살 것인지가 목회의 성공여부를 결정짓는 것처럼 보이니 우리는 과연 바울을 설교할 자격이 있는가? 바울은 스스로 벌어먹겠다며 텐트를 만들었다. 텐트를 만들면서 바울은 누구에게도 신세를 짓지 않겠노라고 했다. 텐트 만드는 것은 고사하고 찢어진 자신의 양말 한 켤레도 꿰매며 살지 못하는 우리의 게으름과 천박한 선민의식이 부끄럽다. 바울처럼 살아야 한다. 바울처럼 자유롭게 떠나는 목회자가 보고 싶다. 아니 필자부터 그리 살아야 한다. 떠나는 것은 힘든 일일게다. 그러나 그것이 진정 우리가 사는 길임을 또한 알아야 한다. 머무르면 썩는다. 흘러야 통한다. 흐르지 않는 물은 사해가 되고 흐르는 호수는 갈릴리가 되었다. 우리가 사는 길은 떠나는 것이다. 잠시 살겠다고 버티는 것은 자신의 존재가치를 팔아먹는 길이다. 오늘 한국교회는 바울을 생각하여야 한다. 세습하고 머물고 더 가지려는 탐욕스러운 우리는 바울처럼 버리는 연습을 하여야 한다. 바울은 우리처럼 살지 않았다. 그는 푯대를 보았고 그 푯대를 향해 나아갔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푯대는 과연 무엇인가? 하나님 나라인가 아니면 세상의 안락인가? 바울은 필자에게 말한다. 바울처럼 살아보지 않겠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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