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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진짜 장애인인가?


<누가 진짜 장애인인가? >        
                               나섬공동체 나섬교회 유해근 목사 

바울도 나처럼 눈이 보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더 심각한 질병으로 고생했거나... 그럼에도 바울은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교사며 신학자였다. 지금까지 그 누구도 바울을 능가하지 못했다. 적어도 바울은 고난과 핍박을 받으면서도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자기만의 삶을 살았다는 측면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이다. 바울은 내게 예수 다음이다. 그만큼 바울은 내 삶의 모델인 것이다. 

1994년 5월 갑자기 눈이 보이지 않았다. ‘며칠 동안 잠을 자지 못해서 그러려니...’ 했는데 그것이 아니다. 병원에서는 ‘급성 포도막염’이라며 무슨 스트레스를 그렇게 많이 받았느냐고 물었다. 
외국인 근로자 선교를 시작한지 불과 1년 5개월만에 나는 병을 얻었다. 육군 군목 출신으로 자신감과 당돌함으로 가득했던 내게 찾아온 실명의 위기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다. 죽고 싶을 만큼 견딜 수 없었다. 
나는 1987년 2월 장신대를 졸업하자마자 목사안수를 받고 육군 군목으로 입대했다. 한국 나이로 26세의 어린 나이에 목사가 된 것이다. 실제로 만24세도 되지 않은 최연소 목사가 된 것이다. 얼마나 교만 방자했겠는가? 
목사가 된 그 해 나는 중학교 교사로 재직 중이던 아내와 결혼을 했다. 그리고 1988년 큰아들 영규를 낳았다. 참 행복했다. 군목을 제대하면 미국 유학을 떠나겠다는 야심찬 계획도 갖고 있었다. 모든 것이 완벽했고, 내 삶은 어느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비젼으로 가득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교만하고 자존심 강한 나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셨다. 작은 아이 영길이가 태어나면서부터 나와 아내에게는 일말의 불안감과 두려움이 시작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영길이는 정신지체를 가진 장애아로 태어난 것이다. 정말 큰 충격이었다. 군목을 제대하고 나는 더 이상 미국유학이나 목회에 대한 생각을 가질 수 없었다. 
하나님을 향한 불평과 원망 그리고 방황이 시작되었다. 목회와 공부에 대한 열망은 식었다.

어느 날 그렇게 큰 실의와 좌절에 빠져있을 때, 내게 외국인근로자 선교를 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이 들어왔다. 아무 것에도 관심이 없이 방황하던 나에게 조금은 신선한 제안이었다. 즉각 그 제안을 수용했고, 나는 난생처음 구로공단에 들어갔다. 그리고는 외국인근로자들을 만났다. 그것이 이들과의 첫 만남이었다. 한 이 년 정도 경험삼아 해보겠다는 얄팍한 속셈도 있었다.  당장의 고통스러운 삶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이유도 없지는 않았다. 

그런데 불과 1년 5개월만에 눈이 보이지 않게 된 것이다. 미칠 것만 같았다. 도대체 이게 무슨 저주이며 심판인가? 내가 무엇을 그리 크게 잘못했기에  내 작은 아이와 내게 이런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주시는 것일까? 1994년 12월, 2년 간의 구로동에서의 사역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나는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심각한 우울증과 자괴감 그리고 절망에 빠져버렸다. 죽음을 생각했다. 자살할 것을 결심하고 나는 동해안으로 향했다. 그냥 이렇게 죽어야 한단 말인가? 나는 수없이 그렇게 내게 물었고, 하나님께 물었다. 그리고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는 내 안의 절망의 소리를 들으며 나는 죽음을 선택하기로 했다. 

1995년 2월, 칼 같은 겨울바다 바람을 맞으며 나는 동해안 어느 항구에서 죽어가고 있었다. 그러다 죽음직전의 그 날 새벽에 뜻밖의 하나님을 만났다. 겨울항구에 서서 추위에 떨며 물고기 몇 마리를 팔기 위해 서있던 노파의 모습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었다. 죽음보다 더 질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었다. 살려주시는 것이 아니라 죽이지 않으시는 하나님, 내겐 다시 무언가를 시작할 수 있겠다는 희망 같은 음성이었다. 지금 죽는 것보다 더 우선해야 할 하늘의 뜻이 있음을 알게 되었고, 그 길로 나는 다시 서울의 뚝섬지역으로 들어갔다. 성수동 공단에서 일하는 이방인들...  그러나 그들은 이전에 내가 구로동에서 보았던 그런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더 이상 인권운동이나 사회운동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세계선교의 지렛대로서 내게 의미있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하나님은 내 고난을 통하여 나를 성숙시키셨고, 이방인들을 바라보는 내 시야를 수정시켜 주셨다. 사실이지 구로동에서 외국인근로자들을 만나던 시절, 그들은 단순히 인권이나 사회운동의 대상일 뿐이었다. 당시 그들을 향한 선교는 내게 관심사항이 아니었다. 그런데 동해에서 죽음의 겨울바다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내 생각과 비젼이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나 중심의 사역에서 하나님 중심의 사역으로 바뀐 것이다. 어설픈 인본주의 신학에서 신본주의 신앙인으로 거듭나기 시작한 것이다.     

‘고난은 내게 유익이라’ 말했던 바울의 고백이 내 고백이 되었다. 나와 내 아들의 아픔을 통하여 나는 드디어 나와 내 가정, 그리고 외국인 근로자 사역을 통한 하나님의 섭리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목사가 된 것이 벼슬을 얻은 것으로 생각했던 나에게 목회자로서의 진정한 부르심과 사명이 무엇인지 알게되는 결정적인 사건이 되었던 것이다. 

육신의 눈이 보이지 않으면 또 다른 세상이 보인다. 사람들은 자신이 보고 있는 것에 속고 산다. 자신이 보는 것이 진짜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그것을 믿지 못한다. 그냥 눈을 뜨고 있는 것일뿐이다. 정말 인간은 눈을 뜨고 살고 있는 것일까? 그들이 보는 것이 진짜일까? 
나는 눈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내 속 안의 또 다른 눈은 이전에 보지 못했던 새로운 세상에 대하여 보여주고 있었다. 사람은 다양한 눈을 갖고 산다. 그중 어떤 눈이 진짜 눈이지 사람들은 구별하지 못하고 살뿐이다. 

눈이 보이지 않게 되면서 다시 시작한 외국인근로자 선교사역은 바로 그런 새로운 세상에 대한 비젼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하나님 나라의 실현과 확장이라는 구체적인 비젼을 갖게 되었다. 전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마지막 선교의 기회가 지금우리에게 주어졌다는 긴박함으로 선교에 대한 눈이 띄어지기 시작했다. 외국인근로자들은 운동의 대상이 아니라 선교의 대상이다. 그들은 선교의 모판이고 징검다리이다. 그들은 세계선교를 위한 하나님의 섭리를 갖고 땅 끝에서부터 보내진 사람들이라는 음성도 들었다. 육신의 눈이 보이지 않으면서 구체적으로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과 비젼을 품게 된 것이다. 

한 2년 만 해보려던 이방인 사역을 시작한지 어언 14년이 흘렀다. 참으로 이 구질구질한 나그네 선교현장으로부터 더 이상 벗어날 길이 없어 보인다. 이것이 내 삶의 감사다. 이 구질구질함이 그리고 아직도 바닥에서 헤어나지못하고 헤매이는 내 삶이 감사다. 눈이 보이지 않아 더듬거리며 외국인의 이름을 물어야 그의 존재를 알아차리는 내 이 피눈물나는 인생이 감사다. 왜? 이렇게 살지 못했다면 나는 진짜 목회자로 살아갈 수 없었을 천박하고 냄새나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렇다. 어린 나이에 목사가 되고, 기세등등한 목회자로 살았던들 그것이 진짜였을까? 잘 나가는 목회자나 신학자가 되었다고 그것이 내 삶의 진정한 의미일 수 있었을까? 내 비록 지금까지 앵벌이 목사로 살고 있지만 결코 가볍거나 얕지 않은 삶을 살고 있다는 자부심만은 충만하기에 담담히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 정말 나는 눈이 보이지 않음으로 살아남은 목사, 눈이 멀어 행복하고 기분좋은 목사다. 장애인이어서 감사하고 그 모습 이대로 쓰임받아 눈물나게 감사할 것이 많은 목사다. 

내가 섬기는 ‘나섬공동체’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새로운 세계선교의 파라다임을 만들어 한국교회에 제시할 것이다. 외국인근로자를 통한 세계선교의 모델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게 될 날이 올 것이다. 나는 그것을 보았다. 눈이 보이지 안으므로 또 다른 세상을 보게 된 것이다. 육신의 눈보다 더 중요한 눈이 있다. 하나님은 육신의 눈을 어둡게 하시면서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없는 더 중요하고 분명한 눈을 내게 주셨다. 누가 진짜 장애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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