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5 : 17
4차 산업혁명이란?
다보스 포럼(Davos Forum)의 의장인 크라우스 슈바브(Klaus Schwab)가 처음으로 4차 산업혁명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4차 산업혁명에 대한 많은 언급이 있지만 한마디로 우리가 사는 미래는 기존의 경제 패러다임이 아닌 전혀 새로운 기술과 가치가 융합되는 사회가 된다는 것이다.
인공지능을 비롯한 인간이 로봇처럼 되는 것과 로봇이 인간처럼 진화된다는 것이 4차 산업혁명의 근간이다. 인간에게 필요한 장기를 로봇으로 대체하는 것을 사이보그(Cybog)라 하며 로봇이 인간처럼 진화하려는 것을 휴머노이드(Humanoid)라고 한다.
나는 분명히 얼마 지나지 않아 내 눈을 대체할 새로운 기술의 도움을 받아 다시 보게 될 것이라 믿는다. 600만불의 사나이처럼 잃어버린 눈을 만들어 보게될 것이다. 그 눈이 사이보그다. 나는 그 날을 기다리며 4차 산업혁명을 주목하고 있다.
눈뿐만 아니라 모든 장기는 3D프린터로 직접 자신에게만 적합한 맞춤형으로 제작이 가능해 진다. 그렇게 되면 인간은 지금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모습으로 탄생할지도 모른다. 모든 몸은 뇌만 빼고는 거의 재생이 가능해 짐으로 수명은 지금과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연장될 것이다. 100세 시대가 아닌 120세까지 살아야 할 것이다. 아니 그 이상도 가능해 진다.
그러므로 노인의 개념도 달라져야한다. 우리는 앞으로 노인들을 노인이 아닌 새로운 세대 또는 다음세대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른다. 4차 산업혁명이 만들어내는 시대는 지금과는 너무도 달라 충격적일 수도 있다. 사람이 로봇의 도움으로 후천적 기능 장애는 물론이고 선천적 장애까지도 대체할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나는 4차 산업혁명이 나를 위하여 올 것임을 예견하며 기다린다.
그러나 조심스럽게 걱정스러운 것이 하나있다. 그것은 4차 산업혁명이라는 기술의 진화는 한편 신 없는 세상, 어쩌면 하나님을 대체하려는 교만과 잇대어 있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다. 갈수록 신 없는 세상을 주장하려는 이들에게 4차 산업혁명이라는 기술의 진보야말로 가장 기대했던 미래상이 아닐까? 창조보다 더 창조스러운 4차 산업의 미래는 하나님의 창조능력을 의심하거나 초월할 수 있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만 던져주는 것이 아닐까 걱정된다. 그러나 어찌하랴? 이미 세상은 뒤집어지고 기술의 진화는 끝없이 달리는 로켓처럼 발사대를 떠난 지 오래다. 4차 산업혁명이 인간의 삶을 엄청나게 바꾸어낼 것은 분명하다. 반면 동시에 인간의 미래를 행복하게 할 수 있을지에 대하여는 불투명하다.
노동과 신앙의 종말인가?
펜실베니아 경영대학원의 미래학교수이며 경영학자인 3차 산업혁명의 저자 제라미 리프킨(Jeremy Rifkin)는 현대사회의 특징으로 노동의 종말을 예고한다. 노동의 종말이란 더 이상 인간의 노동이 지금처럼 필요하지 않은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는 것이다. 하긴 지금도 곳곳에 은행 역할을 하는 자동입출금 기계가 들어서 있다.
우리주변에는 수많은 자동화 기계로 더 이상 인간의 노동력이 필요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노동의 종말이라는 시대적 흐름을 느끼게 하는 수많은 사례가 있다. 특히 4차 산업혁명은 인간의 노동이 더 이상 필요없는 시대임을 예고하는 증거다. 여기에 더해 종교의 종말 혹은 신앙의 종말까지 찾아오고 있다. 하나님의 능력을 대체하는 기술혁명의 진화는 종교와 신앙의 시대에 종말을 고하는가?
4차 산업혁명의 시대는 신앙의위기를 초래한다. 그것은 하나님이라는 절대적 존재를 대체할 만큼의 위력을 가진 대 사건이기 때문이다.
이즈음 우리는 무엇을 생각하고 찾아야 하는가? 4차 산업혁명이 교회와 신앙에 의미하는 화두는 무엇인가를 고민할 때가 된 것이다. 노동의 종말과 종교와 신앙의 종말을 고하는 혁명적 사건이 일어나고 있음을 자각하고 새로운 교회와 신앙적 결단을 할 때다.
새로운 세대의 출현과 교회의 미래
지금까지의 노인과 미래의 노인은 다르다. 아니 달라져야 한다. 앞으로는 새로운 세대라 부르는 것이 더 타당하며 노인이 아님을 스스로 선언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오래 살아야 한다.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참으로 기이한 세대에 살아야 한다. 문제는 기술의 혁신으로 건강하게 오래살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장수의 축복을 자신의 삶속에서 의미있게 수용하고 기쁘고 감사하게 받아들이며 더 가치 있는 삶을 살아갈 용기와 믿음을 소유해야 한다는 것이다.
문제의 핵심은 노인의 주체적 자기인식이다. 자신의 존재가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를 분별하여 4차 산업혁명이 가져다 준 기술과 혁신의 시대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자각하는 것이 필요하다. 노인이라는 기존의 노인 개념에서 빠져 나오지 않는다면 아무리 4차 산업혁명으로 기대수명이 늘어나고 건강하게 오래 살아도 의미가 없다. 4차 산업혁명의 의미를 자신의 삶에 적절하게 응용하고 새로운 세대의 일원으로 당당하게 살아야 하는 자기 혁신의 의지를 소유하여야 한다.
기술의 혁명만큼이나 빠르게 진화하여야 하는 것이 의식의 혁명이다. 기술이 인간의 삶을 혁신적으로 바꿀 수는 있지만 그 변화를 긍정적으로 수용하는 힘은 의식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기술이 빠르게 발전하여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의식과 믿음이 없다면 인간에게 4차 산업혁명은 돼지에게 진주를 던져주는 것만큼이나 무의미한 것이다.
교회는 4차 산업혁명의 시대에서 바람직한 인생관과 사명감을 교인들에게 다시 한 번 제고시켜야 한다. 교인들은 4차 산업혁명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살피고 살아야 할 미래에 맞는 성도의 삶을 결단하여야 한다.
과연 4차 산업혁명이 교회의 미래에 던지는 화두는 무엇인가?
우리 교회 권사님의 한마디
'지금의 나는 솔로몬보다 더 많은 것을 누리고 살아요.' 어느 날 우리 교회 권사님 한분이 이렇게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하긴 솔로몬도 지금의 우리보다 더 좋은 것을 누리고 살았을까?
이렇게 맛있는 것을 먹고, 이렇게 화려한 옷을 입으며 이렇게 상상못할 세상을 살아 보았을까? 아니다. 솔로몬은 우리보다 더 누리지 못했다. 우리는 솔로몬의 부귀영화를 능가하는 엄청난 세대에 살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는 솔로몬보다 더 행복할까? 이는 다른 문제다. 행복은 소유가 아닌 의미와 가치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우리 교회 고 권사님은 이제 더 이상 소유하고 싶지 않다며 의미있는 삶을 살고 싶다고 한다. 나는 절대적으로 그 말에 동의한다. 우리가 앞으로 지금보다 더 좋은 세상에 살고 더 오래 산다하더라도 그것만이 목적은 아니다. 목적은 우리가 편해지거나 더 부요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가치와 의미를 따라가는 삶이다. 인생의 참 목적을 찾아가는 것이 4차 산업혁명에 걸맞는 새로운 세대의 의식이다. 물론 이런 의식과 목적은 비단 4차 산업혁명의 시대에만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가장 궁극적인 목적을 이루어가는 것을 바라보면서 한편 하나님 없는 미래를 걱정해 본다.
하나님의 존재까지 부정할 수 있는 4차 산업혁명의 진화는 두려움이며 한편 걱정스러운 바벨의 추억을 떠오르게 한다. 오히려 지혜로운 사람은 이럴 때에 겸손해지고 본질적 목적의식을 찾아가는 신앙적 삶을 사는 사람이다.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것이 혁명적 삶이다.
창세기 11장은 바벨탑에 대한 기록이다. 인간의 욕망과 교만이 하늘 끝까지 도달하려 했다는 것에 대한 심판의 사건이 골자다. 그 일로 인간은 소통의 문제에 봉착한다. 다시 말하면 언어의 흩어짐이다. 흩어지고 나누어짐으로 심판의 대가를 치러야 했다. 언어는 인간의 삶에 있어 가장 중요한 교감의 통로인데 그것에 상당한 문제가 생겨난 것이 심판의 결과라는 것이다. 인간의 교만과 원죄는 노동에 대한 의무와 의사소통의 한계를 설정함으로 하나님 앞에서 겸손함을 깨닫는 것이다.
그러나 기술의 혁명적 진화는 노동의 종말을 고하며 노동 없는 인간을 만들어 내고 있다. 로봇이 대체하는 노동의 미래는 축복인가 또 다른 심판인가?
구글은 모든 인간이 원만하게 자신의 의사를 소통할 수 있는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발전을 이루려 한다. 영어를 몰라도 즉각 통역이 가능한 세대가 되었다.
바벨의 저주가 효력을 다한 것인가? 하나의 세상으로 통합하려는 분주한 움직임이 세계적인 변화의 또 하나의 조짐이다.
그렇다고 4차 산업혁명이 사단의 계획이라고 말하는 것은 지나친 확대해석이다. 이 시점에서 우리가 살피고 따져보아야 할 것은 역시 의식의 혁명이다. 이럴 때 오히려 겸손해지고 기술의 혁명이 가져다줄 미래를 하나님 나라를 위한 디딤돌로 그리고 새로운 선교의 기회로 만들어 가야할 것이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 없는 세상으로 나아갈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선교의 기회를 붙잡을 것인지 갈림길에 서 있다. 어느 쪽으로 갈 것인지는 우리의 선택이다. 신을 떠날 것인지 축복과 기술의 혁신으로 이어지는 은총을 하나님의 선물로 누리며 새로운 선교적 삶을 살 것인지는 각자가 선택할 자신의 몫이다.